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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시시각각

정치는 여전히 4류에 머물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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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김동호 논설위원

김동호 논설위원

열흘 전 이 시대의 거인 이건희 삼성 회장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호랑이는 가죽을,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 그대로다. 그를 두고 뉴욕타임스는 “삼성전자를 거대한 전자 기업으로 바꿔놓았다”고 했고, 파이낸셜타임스는 “삼성을 세계적 기술 리더로 이끌었다”고 기억했다.

이건희 30년간 극일하는 동안 #정치는 ‘등급외’라는 조롱 받아 #국민이 나라 지켜야 하는 현실

1987년 그가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했을 때 삼성전자는 가수로 치면 ‘무명가수’나 다름없었다. 소니·파나소닉·도시바·히타치 같은 일본의 ‘스타 가수’들이 세상을 주름잡을 때였다. 삼성은 성능과 디자인 모두 2류였다. 불과 30년 조금 지난 얘기다. 지금처럼 해외에 나가면 삼성전자 광고판이 거리를 화려하게 수놓고 전 세계 사람들이 갤럭시폰으로 통화하는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중화사상에 갇혀 근대화에 뒤지고 일제 식민지로 전락했던 한국은 모든 게 2류, 3류였다. 제품은 뭐든 일제(日製)가 최고였다. 한국은 볼펜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이건희는 이 콤플렉스를 일거에 날린 사람이다. 정치인들이 진영 결집을 위해 반일(反日)을 선동하고 입으로만 극일(克日)을 외칠 때 그는 묵묵히 극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일본 기업들은 삼성전자의 약진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문을 닫았다. 삼성이 언감생심 넘보지도 못했던 소니는 이제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됐고, 파나소닉은 오래전에 존재감이 없어졌다.

물론 삼성의 이런 저력은 1983년 반도체 투자에 나섰던 창업자 이병철의 선견지명이 발판이 됐다. 그러나 이건희는 아버지를 능가하는 승어부(勝於父)에 도달했다. 삼성그룹 매출은 이 회장 취임 때 10조원에서 386조원으로 늘어났고, 시가총액은 1조원에서 400조원 가까이로 불어났다. 취임 직후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고 했던 45세 젊은 기업인의 꿈은 현실이 됐다. 이 기간 삼성은 반도체·스마트폰·모니터·TV 등에서 거듭 세계 1등을 기록했다. 10만 개 남짓 하던 양질의 일자리는 전 세계에서 52만 개로 늘어났다.

가히 살아 있는 경영의 신이었다. 일본 최고의 살아 있는 경영의 신이었던 파나소닉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를 능가한다. 마쓰시타의 경영 어록은 지금도 전 세계 기업인들에게 최고의 경영 바이블로 꼽힌다. 그중에서도 365일로 정리한 어록집 『일일일화(一日一話)』는 경영자라면 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이건희의 어록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도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여론조사에서도 그가 사회에 공헌했다는 국민 반응이 84.3%에 달했다. 정치권 일각의 폄훼 시도에도 대다수 국민은 이건희의 공로를 잘 기억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는 민간 외교관이기도 했다. 평소 “국가가 잘되려면 국민·정부·기업이 하나가 돼 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른바 삼위일체론의 실천이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지구 다섯 바퀴가 넘는 거리를 돌았던 사회 참여 활동도 그래서 나왔다. 그가 진정으로 경영의 신으로 불려도 좋은 것은 품질에 대한 무한도전 때문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1995년 삼성전자 구미공장에서 실행한 불량제품 화형식이다. 시가 150억원에 달하는 불량 휴대전화를 불태우자 그간 타성에 젖어 2류에 안주했던 삼성 구성원들이 1류로 재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그가 남긴 혁신의 DNA는 아직도 대한민국 곳곳에 스며 있다. 무엇보다 그가 일갈한 “정치는 4류, 관료는 3류, 기업은 2류”라는 말은 지금도 메아리치고 있다. 우리 국민은 나훈아가 자부했듯 근면과 성실에서 세계 1등이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는 여전히 4류에 머물고 있다. 어떤 이는 “4류도 아깝다”고 한다. 소고기 6개 등급으로 치면 ‘등급외’가 적절하다면서다. 나라와 국민보다는 내 편과 진영의 이익을 위해 좌우 기득권 집단이 끝없이 물어뜯는 암울한 현실이다. 이건희가 일갈하고 나훈아가 꿰뚫은 대로 1류 국민이 나라를 지키는 수밖에 없다.

김동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