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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의 두 번째 상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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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임장혁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임장혁 정치부 차장·변호사

임장혁 정치부 차장·변호사

2017년 2월 28일.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박영수 특검팀은 이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모두 30명을 기소하며 90일간의 수사를 마쳤다. 특검팀의 지상 과제는 이 부회장의 뇌물공여 혐의 입증이었지만 특검팀이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다수의 전 공직자에게 가장 많이 적용한 혐의는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형법 123조)였다.

야권 대선 주자로 각광받는 윤석열 검찰총장은 사법사에는 ‘123조를 재발견한 자’로 기록될지 모른다. 특검팀의 덤이었던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우병우 전 민정수석 사건은 123조가 뼈대였다. ‘재발견’ 후 윤 총장이 한때 대리한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은 직권남용 기소 퍼레이드였다. 서울중앙지검을 접수한 윤석열 라인이 양승태 대법원장 등 법원 주류 집단을 꿰는 데 쓴 것도 123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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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발견’ 직전 해인 2016년 검찰이 처리한 직권남용 사건 1049건 중 기소된 사람은 24명(약 2.29%), 이중 구속기소는 4명뿐이었다. 같은 해 이 혐의로 실형이 확정된 사람은 2명이 전부다. ‘직권’이 있어야 ‘남용’이 문제가 되는 구조에서 검사들이 매번 일반적 권한의 존재를 입증하는 데 실패해서다.

판도라의 두 번째 상자인 공수처가 열리기 직전이다. 공수처는 형식적으론 고위공무원이 저지르는 모든 범죄를 수사할 수 있지만 실상 ‘직권남용 수사처’가 되기 쉽다. 대어인 뇌물류는 기업인의 배임·횡령 등을 수사하다 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다. 공수처는 경·검의 수사도 고위공직자가 등장하면 뺏어 올 수 있다. 자연히 경·검은 사건이 익을 때까지 공수처가 낌새를 못 채도록 애쓸 것이고 이첩도 순탄치 못할 게 뻔하다.

정치권은 벌써 공수처의 제물 1호가 누구일까에 관심이 많다. 여권에선 장모 관련 의혹이 제기된 윤 총장이 거론된다. 그러나 공수처법상 수사 대상이 아닌 장모에서 시작해 윤 총장을 엮기란 쉽지 않다. 최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후보로 급부상했다. 지난달 20일 라임 관련 등 5개 사건에서 윤 총장의 지휘권을 박탈한 3번째 수사지휘권 발동 때문이다.

추 장관이 근거로 삼은 검찰청법 8조(법무부 장관은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 검찰총장만을 지휘 감독한다)는 누군가 그를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하려 할 때도 요긴할 수 있다. ‘일반적 권한’ 입증이라는 최대 난관을 무사 통과하게 할 마패 격이다. 검찰청법이 보장하는 총장의 권한을 박탈한 건 ‘권리행사 방해’라는 또 다른 관문도 쉽게 젖힐 결단이다. 남는 건 도가 지나쳤냐 아니냐는 공방뿐이다. 두 번째 상자가 열리면 여야는 정권 쟁탈을 위해 사생결단해야 한다. 너무했느냐는 엿장수의 영역이라서다.

임장혁 정치부 차장·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