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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실종, 승복도 불분명···이렇게 불안한 美대선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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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미국 대선 유세 마지막 날인 2일(현지시간) 위스콘신주 케노샤공항에서 열린 대중 유세에서 맏딸 이방카의 연설을 지켜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EPA=연합뉴스]

미국 대선 유세 마지막 날인 2일(현지시간) 위스콘신주 케노샤공항에서 열린 대중 유세에서 맏딸 이방카의 연설을 지켜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EPA=연합뉴스]

앞으로 미국의 4년을 책임질 사람을 뽑기 위한 개표가 한창 진행 중이다. 그런데 미국 내 주요 도시에서는 폭력 사태로부터 상점을 보호하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다. 곳곳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와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 지지자 간 충돌이 벌어지며 일부 주에는 주방위군이 배치됐다. 대선의 치열함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우정엽 세종연 센터장이 본 미 대선 #트럼프·바이든, 혼전 속 승리 장담 #대선 후 최악 불복·폭동 우려 나와 #차기 대통령, 혼란 치유 못하면 #중국에 글로벌 위상 밀릴 수 있어 #트럼프, 지지자 결집에만 집착 #유세장에서 갈등의 각 더 세워 #미국, 민주주의 품격 되살려야 #세계무대에서 역할도 회복될 것

선거는 승자와 패자가 명확히 갈리기 때문에 전쟁 용어가 곧잘 사용된다. 우리는 선거전이라고 표현하고, 미국에서도 주요 경합지를 전장(battle ground)이라고 한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다.

선거는 정권 교체를 평화적으로 이뤄내기 위한 장치다. 거기에는 공정한 선거와 그에 대한 승복이 전제된다. 패자의 승복 연설이 미국 민주주의의 대표적 모습이 아니었나? 이러한 혼란은 지금 미국의 민주주의가 어느 상황에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20년 전 조지 W 부시 후보와 앨 고어 후보가 맞붙은 선거는 미국 대선 역사상 가장 치열한 다툼 중 하나였다. 2016년 당시 트럼프 후보가 클린턴 후보에게 총투표 수에서는 지고 선거인단에서 승리를 거뒀는데, 20세기 이후 그러한 예는 2000년 단 한 번뿐이었다. 1888년 선거 이후 미국인들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선거 당일 승복을 선언했던 고어 후보가 승복을 물리는 일까지 벌어질 정도로 플로리다주의 개표는 혼란 그 자체였다. 최종 승자 확정까지 시간은 걸렸지만 그 누구도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정도의 혼돈과 폭력을 우려하진 않았다.

당시 고어 후보가 승복을 발표했다가 거둬들이자 고어 후보 지지자들은 열광했지만 정치의 영역에 사법을 갖다 대는 것이 올바른가, 승복을 발표한 후보가 뒤집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물음이 계속됐다. 이번 2020년 선거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지난 10월 9일 첫 TV토론에서 나타난 기막힌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상대 후보의 말에 끊임없게 끼어들며 방해하고 조롱하는 미국 대통령을 보았다.

다시 2000년으로 돌아가 보자. 부통령을 지낸 고어 후보는 텍사스 주지사 출신인 부시 후보보다 국내외 정책에 대해 훨씬 정통하고 언변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토론회 이후 내려진 평가는 고어 후보에게 부정적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시 후보가 발언하는 도중 고개를 젓고, 결정적으로 한숨을 내쉬는 장면이 중계됐다. 그것 하나로 고어 후보는 이미지에 큰 상처를 입었다. 품위 없음에 대한 비판이었다.

품위 실종, 승복 의사도 불분명 … 미국 대선, 이런 적 없었다 

이날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대에서 열린 선거 독려 캠페인에서 레이디 가가와 이야기하는 조 바이든 민주당 대통령 후보(왼쪽). 두 후보는 막판까지 경합주를 잡기 위해 치열한 유세전을 벌였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날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대에서 열린 선거 독려 캠페인에서 레이디 가가와 이야기하는 조 바이든 민주당 대통령 후보(왼쪽). 두 후보는 막판까지 경합주를 잡기 위해 치열한 유세전을 벌였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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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미국은 품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바이든 후보의 유세 차량을 위협한 본인의 지지자들을 옹호하다 못해 부추긴다. 품위 없음은 더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 결과에 승복하겠냐”는 질문에 그러겠다고 확언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투표 과정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면서 불복 의사를 내비친다. 바이든 후보도 트럼프 대통령이 조기에 승리 선언을 할 수 있다는 우려와 관련, “대통령은 선거를 훔칠 수 없다”고 말했다. 누가 되든 최악의 분열이나 폭동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되는 대목이다.

이번 미국의 선거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찬반의 성격으로 규정됐다.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해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 문제를 잘 다뤘느냐 하는 것이 더해지면서 다른 이슈는 깊게 논의되지 못했다. 세계 무대에서의 미국의 역할과 같은 주제는 이 품위 없는 논쟁에서는 호사가 돼버렸다. 선거를 위해 중국을 때릴 뿐 세계의 앞날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제아무리 단단한 시스템과 제도로 움직이는 국가라 해도 결국 사람이 움직이는 것임을 이번 미국의 선거 과정이 보여주고 있다. 깊이 있는 논의 대신 트위터의 짧은 한 줄로 상대방을 조롱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통치 방식은 미국 사회 전반에 스며든 듯하다. 지지자들의 강력한 결집만이 승리의 길로 가는 길이라고 믿는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통합을 위해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보다 그 갈등의 각을 더 세워 왔다. 선거는 있지만 민주주의는 중요하지 않았다.

4년마다 돌아오는 미국의 대통령선거는 미국의 미래를 논의하는 가장 중요한 자리였다. 국내외 정책에 대한 양당의 논의는 전 세계 국가들에 세계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함께 고민하도록 했다. 그러나 올해 미 대선은 그러한 논의 없이 혼란 속에 치러졌다. 단순히 코로나 영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누가 당선되든 갈릴 대로 갈린 미국 국민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미국의 혼란은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 재편을 꿈꾸는 중국에는 기회가 된다. 차기 대통령이 대선 이후 혼란을 치유하지 못하면 미국의 위상이 추락하며 중국의 부상은 더 거세어질 것이다.

이제 곧 미국의 4년을 책임질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그러나 그의 책임은 미국 내에만 머물지 않는다. 과거 미국이 보여준 민주주의의 품위를 다시 볼 수 있을지, 아니면 더 깊은 혼란으로 빠져들지 한국에 있는 필자가 걱정하는 상황이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미국의 책임이 미국 너머까지 미친다는 것을 미국인들이 인식할지 의문이다. 미국이 민주주의의 품위를 회복할 때 다시 세계 무대에서의 역할도 회복될 것이라고 본다면 지나치게 낙관적인 걸까?

◆ 우정엽

우정엽

우정엽

미국 위스콘신대(밀워키)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산정책연구원 워싱턴소장 겸 연구위원을 거쳐 현재 세종연구소 미국연구센터장으로 있다. 미국 정치와 외교·안보 정책 전문가다.

우정엽 세종연구소 미국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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