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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제자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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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경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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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할 줄은 정말 예상 못 했다. 당시 국제경제 등을 담당하는 데스크였는데, 손 놓고 있다가 트럼프 경제정책을 분석하느라 한동안 바빴다.

트위터·페북도 차단하는 막말 #한국 언론은 가장 많이 인용 #이젠 해외토픽에서만 봤으면

트럼프의 과거 언론 인터뷰와 1987년에 나온 그의 자서전 『거래의 기술(The art of the deal)』 등을 참고해 ‘외교도, 경제도, 거래로 생각하는 상대하기 힘든 변칙 복서’라는 논지의 기사를 내보냈다. 나중에 유령작가가 대필한 것으로 밝혀지긴 했지만 『거래의 기술』이 주목받으면서 국내 한 출판사의 88년 국내 번역본 신문광고가 뒤늦게 네티즌의 성지순례 대상이 됐다. 당시 42세의 트럼프를 ‘미국의 대통령감’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게 정확한 예언이 됐기 때문이다.

이번 주 최대 뉴스는 미국 대선이다. 뉴욕타임스(NYT)·워싱턴포스트(WP) 등 대다수 미국 언론은 이미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도 최신호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가치의 수호자, 미국의 양심,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대변자로서 책무를 다하는 데 형편없이 미달했다”고 비판했다.

몇 가지 포인트에 공감했다. 트럼프가 자신에게 투표하지 않은 대다수의 국민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고 지지층만을 위한 정치로 민주주의 문화를 파괴했다는 지적은 신랄했다. 주지하듯이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보다 300만 표 가까이 더 받았지만 선거인단 수에서 밀려 패배했다. 팩트가 아닌,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대안적 진실’이라는 말로 진실을 모독하는 트럼프의 행태는 머리를 돌게 할 정도라고 했다. 자기편 챙기기와 거짓말은 규범과 제도의 작동을 가로막아 정책마저 망쳤다. 세계 최악의 미국 코로나19 사태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서소문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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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조 바이든의 우세가 예상되지만 4년 전처럼 트럼프의 막판 뒤집기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미국에서 부통령 임기를 끝내고 대선에 나와 당선된 경우는 드물다. 이제껏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마틴 밴 뷰런, 리처드 닉슨, 아버지  부시 5명뿐이다. 부통령이라는 자리는 따분하고 어중간하다. 기껏해야 ‘병풍’ 노릇을 하는 데 그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초대 부통령을 지낸 존 애덤스가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없고 하찮은 직책”이라고 말했을 정도다(김지윤, 『선거는 어떻게 대중을 유혹하는가』).

대선 불복으로 한동안 혼란이 이어지는 게 가장 안 좋은 시나리오다. 불확실성을 싫어하는 경제는 몸살을 앓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외교나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앞서, 입만 열면 분열을 조장하고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트럼프의 언어 공해 방지가 나의 가장 큰 관심사다. 오죽했으면 트위터나 페이스북이 제 나라 대통령이 올린 글을 수시로 차단하고 경고 문구까지 붙일까.

하지만 그런 품위 없는 발언을 우리는 무시할 수가 없다. 세계 최강국 대통령인 데다 쏟아내는 말 자체가 워낙 많아서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뉴스 빅데이터 분석시스템 ‘빅카인즈’에 따르면 올해 1~6월 한국의 54개 언론사가 가장 많이 인용한 인물은 트럼프(1만4404번)였다. 문재인 대통령(1만996번)보다도 많았다.

그의 말이 왜 문제일까. 2018년 정신의학자 등 미국 전문가 27명이 트럼프의 정신상태를 분석해 책을 냈다. “트럼프는 극단적 현재 쾌락주의자다. 자신의 자아를 부풀리고, 선천적으로 낮은 자존감을 달래기 위해서라면 무슨 말이든 가리지 않고 하며, 과거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다. 즉흥적인 말 또는 큰 결정이 불러올 미래의 파괴적 결과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트럼프: 미국인의 꿈’을 보면서 트럼프와 공공의 가치는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트럼프가 미국에서처럼 장기간의 세금 감면 혜택을 받으면서 한국에서 사업했다면 대통령은커녕 검찰에 숱하게 불려가고 교도소 담장 위를 위태롭게 걷는 신세였을지 모른다.

한국 시간으로 오늘 낮부터 미국 대선 투표가 시작된다. 1968년 이후 한 번도 투표율 60%를 넘지 못한 미국이지만 이번에는 사전투표가 많다니 한번 기대해본다. ‘트럼프 공해’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태평양 너머 작은 나라 국민의 소망을 부디 꺾지 말아 주시길. 트럼프 기사는 기묘하고 기막힌 얘기를 주로 다루는 해외 토픽으로만 보고 싶다. 그게 트럼프의 제자리라고 생각한다.

서경호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