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김기찬의 인프라

다치면 끊기던 '근로생명', 그 생명이 다시 펄떡인다

중앙일보

입력 2020.11.03 00:28

업데이트 2020.11.03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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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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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A(56)씨는 몇 해 전 포장지 업체에서 일하다 오른 손가락 4개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분진 배출상태를 확인하려 배출시설에 손을 넣었다 벌어진 일이다. 산업재해보상보험으로 치료를 받고 상처는 아물어 갔다. 그러나 마음까지 치료할 수는 없었다. 그는 모든 걸 멀리하기 시작했다. 일하던 동료조차 만나기 싫었다. 다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란 자괴감이 겹치면서 대인기피증은 심해져 갔다. 손가락이 없는데도 마치 있는 것처럼 통증을 느끼는 환상통까지 겹쳤다. 우울증과 스트레스가 그를 짓눌렀다.

돈만 주던 산재보상에서 환골탈태
재활로 10명 중 7명 다시 일터로

전국 8개 거점에 재활전문센터
산재 트라우마 치료시스템 도입

아시아 9개국에 K산재보험 이식

가족마저 지쳐갈 무렵 잡(Job) 코디네이터(잡 코디)가 그를 붙잡기 시작했다. 잡 코디는 근로복지공단이 산재 노동자의 원직장 복귀를 돕기 위해 도입한 직무다. 그는 A씨에게 심리상담사부터 붙였다. 무엇보다 마음을 다잡는 게 가장 중요해 보였기 때문이다. 산재 치료 뒤 직장에 복귀한 노동자를 멘토로 배치했다.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A씨는 “그들은 내 입장에서 필요한 모든 걸 해주더라”라고 회고했다. 손가락이 없지만, 손 전체의 근력을 향상(라파엘)하는 등 재활치료를 병행했다. 잡 코디는 A씨가 다니던 회사에도 수시로 A씨의 상태와 훈련 이행 상황을 전달했다. 직장에 복귀시키기 위한 정지작업이었다.

산재보험, 이젠 근로자는 물론 중소 사업주도 받는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산재보험, 이젠 근로자는 물론 중소 사업주도 받는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렇게 1년여의 세월이 흐른 뒤 A씨는 웃음을 되찾았다. “그저 다쳤을 뿐”이라는 말과 함께다. 한쪽 손가락이 없다는 사실을 잊은 듯했다. “이전 생활과 달라진 게 없다”고도 했다. A씨는 직장에 복직해 예전처럼 일하고 있다.

산재보험은 56년 전인 1964년 7월 도입됐다. 그동안 숱하게 많은 근로자가 산재보험의 혜택을 봤다. 하지만 원래 다니던 직장에 복귀하는 일은 드물었다. 산재보험이 보상(보험금 지급) 위주로 운영된 탓이다. 치료만 해줬다는 얘기다. 재활은 뒷전이었다. 다시 사회의 일원으로 자립할 수 있게 돕는 제도나 관심은 전무했다. 오죽하면 산재 노동자의 직장복귀율 통계조차 파악하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일하다 다치면 그 길로 ‘근로 생명’도 끝났다. 일터로 복귀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산재 노동자가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234배 불어난 산재 적용 노동자.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234배 불어난 산재 적용 노동자.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이런 제도적 허점을 보완한 건 2000년 들어서다. 산재보험법에 ‘재활과 사회복귀 촉진’ 조항이 새겨졌다. 이때부터 산재보험제도의 무게 중심이 치료와 보상에서 재활로 옮겨졌다. 강순희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이 “산재보험은 2000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평가를 하는 이유다.

산재보험이 처음 적용되던 65년 산재 노동자에게 준 보험급여는 2억원에 불과했다. 9470명에게 지급됐다. 지난해에는 10만9242명에게 5조5000억원의 보험급여가 지급됐다. 산재노동자가 11배 늘어나는 사이 보험급여는 무려 2만7500배 증가했다. 재활과 직장복귀에 든 비용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험급여는 2만7500배 늘어.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보험급여는 2만7500배 늘어.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산재 노동자가 직장으로 돌아가는 비율이 제대로 집계된 건 2000년부터다. 당시 40%가 직장에 복귀했다. 일하다 다친 10명 중 6명은 일터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의미다. 이후 직장 복귀율은 급속도로 올라갔다. 2006년 45.5%, 2009년 57.2%로 불어나더니 지난해에는 68.5%를 기록했다. 올해는 선진국 평균인 70%대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재활치료 덕분에 사회복귀기간은 2006년 251일에서 지난해 163일로 88일 단축됐다.

치료 뒤 직장으로 복귀하는 사람도 확 늘어.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치료 뒤 직장으로 복귀하는 사람도 확 늘어.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산재 노동자의 재활을 돕기 위한 재활전문센터가 전국 거점별로 8개 들어섰다. 여기에다 의원급 외래재활센터 두 곳도 있다. 이들 센터에는 최첨단 의료기기는 물론 재활의학전문의, 직업치료사, 사회복지사, 임상심리사, 언어재활사, 특수재활교사, 생활체육교사, 직업재활사 등이 배치돼 있다. 가상현실(VR)을 활용한 직무 시뮬레이션 시스템, 웨어러블 로봇, 로봇형 의족 등 인공지능(AI)형 재활장비까지 구비해놨다. 미국 시카고 재활병원, 독일 함부르크 산재병원보다 더 나은 첨단 장비와 재활 프로그램이 접근성 좋은 지역에 그물망처럼 갖춰져 있는 셈이다.

몇 해 전부터는 산재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시스템도 도입했다. 지난해 1월 B(42)씨는 건설현장에서 레미콘이 넘어지는 사고로 동료가 숨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후 그는 심리적 외상으로 일을 못 하는 지경이 됐다. 그는 근로복지공단이 운영하는 재활전문병원에서 심리와 약물치료를 받고 올해 8월 완쾌했다.

국제사회가 한국형 산재·재활제도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국제노동기구(ILO) 아시아태평양 사무소는 2003년 근로복지공단과 특별기술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아시아 전역에 한국의 제도를 이식하기 시작했다. 2012년에는 국제사회보장협회(ISSA)로부터 우수 사례로 꼽혔고, 그 해 아시아산재보험협회(AWCA)가 한국 주도로 설립됐다. 현재 캄보디아, 베트남, 필리핀, 태국, 몽골, 스리랑카, 라오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9개국에 한국형 산재보험 체계가 전수되고 있다. 강순희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은 “다쳐서 흘린 노동자의 눈물이 좌절의 눈물로 이어져선 안 된다”며 “사회보장제도의 목표는 희망을 갖고 웃으며 흘릴 수 있는 눈물을 만드는 데 둬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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