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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을 부탁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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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윤설영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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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동네 목욕탕에 갔다가 안내문을 보고 피식 웃고 말았다. 고령자들에게 목욕탕 할인 서비스를 해주니 동사무소에서 꼭 신청하라는 내용이었는데, 마지막 줄이 압권이었다. “지참물: 신분증과 인감도장” 목욕탕 할인에도 인감도장이 필요하다니, 대체 이 나라에서 도장 없이 가능한 일이 얼마나 된다는 말인가.

도장이 ‘열일’을 하고 있다는 건 3년 전 일본에 도착했을 때, 구청에서 깨달았다. 주민등록을 위한 서류 한 귀퉁이에 도장 찍는 칸 3개가 그려져 있었다. 창구 직원이 상급자들에게 두루두루 도장을 다 받아 서류를 내주기까지 20분 넘게 기다렸다.

한국 동사무소에선 창구 직원이 클릭 몇 번으로 전입신고가 완료됐던 것과 비교하면, 투입되는 시간이나 인력 면에서 효율성이 하늘과 땅 차이다. 심지어 요즘 한국에선 집에서도 인터넷으로 전입·전출 신고가 가능하니 행정의 효율성만 놓고 보면 일본은 후진국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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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서비스가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발목을 잡고 있다는 건 지난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팩스로 확진자 정보를 취합하느라 인력은 인력대로 투입하면서 정확한 감염 상황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고, 재난지원금을 나눠주는 데에도 몇 달이 걸렸다.

후진적인 정부시스템에서 벗어나고자, 스가 정권은 ‘행정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있다. 고노 다로 행정개혁 담당장관을 앞세워 전례주의 타파, 디지털화를 추진하겠다고 나섰다. 고노 장관은 취임하자마자 “도장이 필요한 서류는 이유를 제출하라”며 전 부처에 ‘탈(脫) 도장’을 압박하고 있다. 도장 다음은 팩스, 종이 등 아날로그의 대표선수들을 하나씩 없애겠다고 한다.

하지만 뼛속 깊숙이 배어 있는 아날로그 행정이 단숨에 바뀔 수 있을지 일본 안에서조차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정부 행정에서 온라인으로 완결할 수 있는 비율은 7.5%(일본 종합연구소 조사)뿐이다. 디지털화로 인해 정부가 국민 개개인의 정보를 통제한다는 데에 대한 국민들의 거부감도 크다. 주민등록번호에 해당하는 마이넘버 보급률이 15.5%(3월 1일 기준)에 그치는 게 대표적인 증거다. 디지털화를 전담할 디지털청이 설립되는 것도 2022년 상반기를 목표로 하는 만큼,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이라는 관측이다.

2001년 일본 정부가 발표한 ‘e-Japan 전략’은 ‘5년 이내 일본을 세계 최첨단의 IT국가로 만든다’는 내용이었다.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 일본의 현주소는 정부의 구상과는 정반대다. 오늘도 식탁 위에 쌓여가는 각종 서류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20년 뒤엔 진짜 저 종이 더미가 사라질까.

윤설영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