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진퇴양난 전세 대책, 임대차법부터 고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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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부의 전세 대책이 수렁에 빠졌다. 대란 수준에 이른 전세시장의 혼란을 해결할 뾰족한 수가 당장 보이지 않는다. 정부는 중형 공공임대 확충이나 지분적립형 주택 공급 등에 나서기로 했지만, 중장기 대책일 뿐이다. 월세 소득공제 확대도 검토한다지만 문제의 본질을 비껴간 고식책에 지나지 않는다. 조만간 내놓을 것이라던 대책 발표도 미룬 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는 모습이다.

정부의 고민은 자승자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급 부족 해소를 위해서는 민간 임대주택 공급에 상당 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이는 지금까지의 정책 방향과는 180도 다르다. 실거주 의무를 강화하고 등록 임대사업자의 혜택을 줄인 정부가 지금 와서 민간 임대주택 공급을 위해 대출·세제 규제를 풀기는 어렵다. 전셋값을 잡자니 매매시장을 자극할까 봐 걱정된다. 규제 일변도의 정책이 부른 진퇴양난의 형국이다.

정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전세시장은 ‘패닉’으로 치닫고 있다. KB국민은행 발표에 따르면 10월 전국 전세수급지수는 19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서울 아파트 평균 전셋값은 지난 2년간 7517만원 올랐는데, 이 중 절반은 임대차법 시행 이후인 최근 3개월간 올랐다. 서울 외곽 지역에서는 전셋값이 집값을 밀어올리고, 월세마저 들썩이고 있다. 주거 약자를 보호하겠다던 정부의 약속은 부도수표가 되고 말았다.

문제의 근원부터 되짚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시정연설에서 “전세시장을 기필코 안정시키겠다”며 ‘임대차 3법의 조기 안착’을 해법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임대차법 졸속 시행이 지금의 전세시장 혼란을 촉발한 방아쇠가 됐음은 부정하기 힘들다. 근본적으로는 시장 내 수요-공급 논리에 맡겨야 될 부분까지 정책으로 해결하겠다며 과욕을 부리는 바람에 문제가 커졌다. 부작용을 경고하는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거대 여당의 힘으로 밀어붙인 것이 화근이었다.

문제의 원인을 놔둔 채 엉뚱한 진단을 해봤자 소용없다. 시간이 가면 해결될 것이라는 정부 입장은 무책임하다. 전세 물량을 감소시킨 일련의 정책부터 고치지 않고서는 답이 나오기 어렵다. 전세대란의 도화선이 된 주택임대차보호법부터 손봐야 한다. 요란한 파열음까지 내며 강행한 정책을 지금 와서 바꾸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정책을 용기 있게 인정하고 바로잡는 것이 책임 있는 정책 당국자의 자세다. 규제에 규제를 덧입히는 식의 엉뚱한 대책으로 문제를 키우는 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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