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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 "'살인의 추억' 봤지만 신경 안써...즉흥적 범죄였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재판의 증인으로 채택된 이춘재(57)가 2일 오후 법정에 출석했다.   이춘재는 이날 오후 1시 30분께 수원지법 형사12부(박정제 부장판사)가 맡은 이 사건 재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 사건 당시에 대해 증언했다.   사진은 이춘재가 출석해 증언할 법정 모습. 연합뉴스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재판의 증인으로 채택된 이춘재(57)가 2일 오후 법정에 출석했다. 이춘재는 이날 오후 1시 30분께 수원지법 형사12부(박정제 부장판사)가 맡은 이 사건 재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 사건 당시에 대해 증언했다. 사진은 이춘재가 출석해 증언할 법정 모습. 연합뉴스

"사건을 벌이고 난 후 나름대로 많은 후회도 했다. 이 사건뿐 아니라 제가 한 사건에 관계된 모든 분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겠다. 제가 자백함으로써 (피해자와 그 가족이) 마음의 편안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하루속히 마음의 안정을 찾고 살았으면 좋겠다."

2일 오후 경기도 수원종합법원청사 501호 법정. 희끗희끗한 짧은 머리에 흰색 마스크를 쓰고 청록색 수의를 입은 중년의 남성이 증인석에 섰다.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의 주범 이춘재(57)다. 세월의 흐름으로 이마엔 깊은 주름이 패었지만, 과거 사진 속 날카로운 눈매는 여전했다. 172~173㎝ 정도의 키에 다부진 체격이었다. 이춘재는 이날 자신의 범행을 모두 자백하고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범행 동기에 대해선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두루뭉술하게 피해갔다.

화성 8차 사건에 증인 나서 "내가 진범" 

수원지법 형사 12부(박정제 부장판사) 심리로 진행된 화성 8차 사건 재심 재판에서 이춘재는 피고인이 아닌 증인 신분으로 법정에 섰다. 화성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경기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의 한 가정집에서 A(당시 13세)양이 성폭행당하고 숨진 채 발견된 것이다. 당시엔 윤성여(53)씨가 범인으로 몰려 20년을 복역한 뒤 2009년 가석방됐다. 윤씨는 내내 무죄를 주장해 왔다. 하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춘재가 범행을 자백하자 윤씨는 지난해 11월 재심을 청구했다.

JTBC 뉴스룸에서 보도한 재소자 신분카드에 부착된 이춘재.[JTBC 캡처]

JTBC 뉴스룸에서 보도한 재소자 신분카드에 부착된 이춘재.[JTBC 캡처]

경찰은 지난 7월 이춘재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경기도 화성군과 수원시, 충북 청주 등에서 14건의 살인사건과 9건의 성범죄 등을 저지른 것으로 결론을 냈다. 그러나 이들 사건은 공소시효가 끝나 이춘재에 대한 처벌이 불가능했다. 8차 사건 재심을 담당하는 검찰과 변호인은 "윤씨가 누명을 쓴 것을 확인하려면 이춘재의 자백이 중요하다"며 이춘재를 증인으로 법정에 세웠다. 이춘재는 "화성과 청주에서 발생한 14건의 살인사건의 진범이 맞느냐"는 윤씨 변호인의 질문에 "맞다"고 범행을 시인했다.

이춘재 "즉흥적 범행, 범행 동기 생각 안 나"

이춘재는 시종일관 담담하게 진술했다. 과거 범행 과정은 물론 경찰의 재수사 당시도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춘재는 지난해 9월 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서 수사를 위해 접견을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수사 초기 '진술을 거부할까'하는 생각도 했지만, DNA 등 증거가 있는 데다 '사건이 영원히 묻히진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모든 범행을 자백했다"고 말했다.

1989년 7월 귀가하다 이춘재에게 변을 당한 뒤 시신조차 찾지 못한 '초등생 실종 사건'에 대해선 피해자인 B(당시 8세)양이 신주머니를 가지도 있었고 치마를 입고 있었던 사실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춘재는 "당시 자살을 하려고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과정에서 B양을 만났다. 놀란 B양이 도망을 가길래 무작정 데려가서 범행했다"고 말했다. A양 사건과 관련해서도 A양의 집 구조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양말을 두 손에 끼고, 방문 앞에 책상을 넘어간 뒤 범행을 한 과정을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이춘재가 살해 사실을 자백한 '화성 실종 초등학생'의 실종 당시 유류품이 발견됐던 경기도 화성시의 한 공원에 7일 오전 유가족 등이 헌화한 꽃이 높여 있다. 연합뉴스

이춘재가 살해 사실을 자백한 '화성 실종 초등학생'의 실종 당시 유류품이 발견됐던 경기도 화성시의 한 공원에 7일 오전 유가족 등이 헌화한 꽃이 높여 있다. 연합뉴스

"'살인의 추억' 봤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아" 

그러나 이춘재는 "계획 범행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흉기 등을 준비하지 않았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범행했다", "피해자들이 반항해 (피해자의 옷 등으로) 결박을 했다"는 것이다. 이춘재는 범행을 저지른 뒤 관련 언론보도 등에 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윤씨가 8차 사건의 누명을 쓰고 붙잡혔을 때도 "장애를 가진 분이 잡혔다는 말은 들었지만, 당시 유언비어가 많아서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이춘재는 자신의 범행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을 봤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말했다.

피해자 가족도 이춘재 재판 지켜봐 

이춘재가 답변하는 동안 8차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씨는 피고인석에 앉아 이 모습을 지켜봤다. 이춘재는 피고인석에 설치된 스크린에 증거 자료가 나올 때를 제외하곤 윤씨 쪽으로는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정면만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윤씨에게 "제가 저지른 살인 사건에 대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수용 생활의 고통을 겪은 것에 사죄드린다. 피해자와 유가족이 겪었을 고통에 대해서도 사죄드린다. 반성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다시 한번 사과했다. 재판부는 이춘재의 증인신문을 끝으로 오는 19일에는 결심공판을 할 계획이다. 선고기일도 올해 안에 잡힐 전망이다.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복역 후 출소한 윤성여씨가 2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재심 공판에 출석하던 중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스1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복역 후 출소한 윤성여씨가 2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재심 공판에 출석하던 중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스1

한편 이날 재판은 88석 규모의 대법정과 같은 규모의 중계 법정에서 동시에 공개됐다. 좌석은 사회적 거리두기 원칙을 적용해 좌석이 절반만 운영됐으며, 이춘재의 모습을 보려는 취재진과 방청객이 몰려 준비된 방청권은 모두 동이 났다. 윤씨의 가족들과 수사를 진행해온 검찰 및 경찰 관계자들도 법정을 찾아 수의를 입은 이춘재의 모습을 지켜봤다.

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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