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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가장 섹시한 사나이, ‘007’ 숀 코너리 떠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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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숀 코너리의 마지막 007 시리즈 ‘007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1983). [AP=연합뉴스]

숀 코너리의 마지막 007 시리즈 ‘007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1983). [AP=연합뉴스]

“내 이름은 본드, 제임스 본드.” 1962년 1탄 ‘007 살인번호’에서 이 대사를 했던 원조 ‘제임스 본드’이자 할리우드의 전설적 스타 숀 코너리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바하마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90세.

우유배달·벽돌공 떠돌다 007 맡아 #멋·유머·카리스마 갖춘 영웅으로 #2000년 영국서 기사 작위 받고도 #끝까지 고향 스코틀랜드 독립 지지

코너리는 1930년 영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의 아일랜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청소부, 아버지는 트럭운전과 공장일을 전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학교를 그만둔 코너리도 우유배달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46년 영국 해군에 입대했다가 위궤양으로 3년만에 제대한 후에도 벽돌공, 인명구조원, 관 닦기, 미술과 학생들을 위한 누드모델 등을 했다. 그는 취미로 하던 보디빌딩으로 53년 미스터 유니버스 대회 3위에 오른 것을 계기로 54년 영국 영화 ‘봄에 핀 라일락’ 단역으로 데뷔했다. 훗날 인터뷰에서 그는 “배우 일은 내게 벽돌공 같은 직업이었다”고 회상했다.

8년 뒤 주연으로 발탁된 ‘007’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원작자 이언 플레밍이 “덩치만 큰 스턴트맨” 같다며 코너리를 못마땅해 한 건 유명한 일화. 그러나 제작자 앨버트 R 브로콜리는 키 190cm의 무명 배우에게서 배짱을 봤다. 1편은 제작비의 50배가 넘는 흥행수입을 거뒀다. 코너리가 연기한 제임스 본드는 타고난 기지와 신무기로 적을 희롱하고, 작품마다 ‘본드걸’을 유혹하면서도 신사다움과 유머를 겸비해 영웅주의와 쾌락주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코너리는 곧 아이콘 같은 배우가 됐다. ‘007 위기일발’ ‘007 골드핑거’ 등에 연이어 출연한 그는  ‘007 두 번 산다’(1967)이후 시리즈 은퇴를 선언했지만 팬 성화에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1971) ‘007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1983)으로 두 차례나 복귀했다. 26편 중 7편에서 007을 연기했다.

1988년엔 ‘언터처블’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AFP=연합뉴스]

1988년엔 ‘언터처블’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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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는 “제임스 본드의 신사다움, 섹시함, 터프한 면이 숀 코너리 안에 다 있다”며 “이후 로저 무어와 피어스 브로스넌, 다니엘 크레이그 등은 다 코너리의 변형”이라고 했다. 미국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역대 제임스 본드를 “숀 코너리, 그리고 나머지”로 나눌 정도였다.

코너리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마니’, 시드니 루멧의 ‘힐’ 등 명감독 영화에서도 활약했다. 88년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언터처블’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10대 후반부터 찾아온 탈모를 감추다 공개한 게 이 무렵부터다.

이후 ‘장미의 이름으로’ ‘붉은 10월’ 같은 묵직한 영화와 ‘오리엔트 특급살인’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 ‘로빈 훗’ 같은 대중영화 주·조연을 넘나들며 배우 인생 2막을 열었다. 69세였던 1999년 미국 연예지 피플 선정 ‘금세기 가장 섹시한 남자’에 꼽혔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마법사 간달프 역을 거절하고 선택한 액션영화 ‘젠틀맨리그’가 흥행 실패하면서 2006년 은퇴했다.

그는 2000년 영국 기사 작위를 받았지만, 평생 고향 스코틀랜드 독립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몸에 ‘스코틀랜드여 영원하라’는 뜻을 담은 문신을 새겼을 정도다. 맡은 모든 배역의 대사를 스코틀랜드 억양으로 구사했다. 별세 소식에 스코틀랜드 니콜라 스터전 행정수반은 “애국적이고 자랑스런 스코틀랜드인”이라 경의를 표했다. 6대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는 “시대와 스타일을 정의했다. 영화의 진정한 거장”이라고, ‘007’시리즈 제작자 마이클 G 윌슨과 바바라 브로콜리는 “섹시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비밀요원을 까칠하고 재치있게 묘사해 혁명을 일으켰다”고 고인을 기렸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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