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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이에게 "그런 애들 음침"···미디어가 부추긴 '고아' 편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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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수가 없다 했더니만 고아였냐?" -tvN드라마 '사이코메트리 그녀석' 중

"고아니까, 가정교육을 못 받으면 도둑이 된대" -KBS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중

"고아 새끼라더니 아주 그냥 쓰레기구먼. 부모한테 배워 처먹은 게 없으니 저 모양이지" -KBS드라마 '사랑은 뷰티풀 인생은 원더풀' 중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방영된 지상파와 케이블 드라마에 등장한 '고아' 관련 대사들이다.

19년간 보육원에서 자라 스무살이 되던 해 자립한 보호종료아동 손자영씨(24)는 드라마나 영화 등 미디어에서 '고아'가 표현되는 방식에 대해 의문을 가져 왔다. 범죄자나 왕따, 지나치게 밝은 캔디형 등 극단적인 캐릭터가 많아서다. 최근 손씨가 아름다운재단 '열여덟 어른' 캠페인의 일환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손자영 프로젝트'에 나서게 된 이유다.

'고아' 편견 부추기는 미디어

KBS드라마 '사랑은 뷰티풀 인생은 원더풀'에서 강시월(오른쪽)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일부러 도발하는 장면. 자료 아름다운재단

KBS드라마 '사랑은 뷰티풀 인생은 원더풀'에서 강시월(오른쪽)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일부러 도발하는 장면. 자료 아름다운재단

손씨는 최근 10년간 드라마와 영화 가운데 고아 혹은 보육원 출신으로 나오는 등장인물 46명의 특성을 분석했다. 손씨에 따르면 고아 캐릭터는 주로 ▶악인 또는 범죄자 ▶불륜 여성 ▶왕따 ▶비현실적 긍정파 등으로 그려졌다. 손씨는 "미디어에서 서사나 기승전결에 따라 '고아'의 이미지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부정적, 자극적인 인물로만 묘사하는 것 같다"며 "미디어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날 불쌍하게 보지 않을까, 편견을 가지지 않을까 싶어서 움츠러들거나 예민해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범죄자거나 비현실적인 '캔디'거나

드라마에서 고아는 주로 범죄자나 전과자,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여름, 인기를 끌었던 JTBC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주인공 박새로이도 살인미수 '전과자'에 '고아'였다. 학력도 중졸에 그쳤다. KBS 드라마 '사랑은 뷰티풀 인생은 원더풀'에도 소년원 출신의 전과자 강시월이 나온다.

JTBC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에서 선생님이 체육시간에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의 범인으로 고아인 등장인물을 의심하는 장면. 자료 아름다운재단

JTBC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에서 선생님이 체육시간에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의 범인으로 고아인 등장인물을 의심하는 장면. 자료 아름다운재단

영화 '악인전'에서 사이코패스로 등장하는 강경호는 '살인에 익숙하고, 살인을 저지르는데 주저함이 없는 살인마'라고 소개된다.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갖게 된 이유는 부모가 없기 때문이라고 나와 있다.

고아로 자란 여성 캐릭터의 경우엔 남성을 유혹하고 불륜을 저지르는 인물이나 비현실적으로 밝은 모습을 유지하는 '캔디형' 성향으로 묘사됐다. SBS드라마 ‘해피시스터즈’에서 비서 역할을 맡은 조화영은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무기로 주로 잘 나가는 유부남들과 거침없는 불륜을 행하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SBS드라마 '애인있어요'에서 '태양의 집' 출신 고아인 강설리도 불륜 여성으로 그려진다.

KBS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동백은 고아 출신이자 미혼모로 나온다. 동백의 어린 시절 장면에서 학교 선생님은 "우리 반 결손 가정 둘 알지? 그런 애들 특유의 음침한 거. 하나는 소 죽은 귀신에 씐 애처럼 음침하고, 하나는 싹수가 노랗지 뭐"라고 말하며 고아에 대한 편견을 강화한다.

억척스럽고 발랄한 분위기도 미디어 속 고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KBS '너는 내 운명'의 장새벽, MBC '내 딸 금사월'의 주인공 금사월, MBC '황금정원'의 은동주 등은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고아 출신 캐릭터의 대표적인 예다.

손씨는 "미디어는 '고아'라는 설정 그 자체만으로 캐릭터의 특성을 일반화한다"며 "부모가 없는 특성을 표적화하기가 쉬운 것 같다. 나쁜 일을 저지른 범죄자라고 하면 가정환경 문제를 먼저 살펴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말했다.

손씨 "평범한 청년으로 그려졌으면"

보호종료아동 손자영(24)씨는 미디어 속 보호종료아동 등장 장면을 당사자 시선으로 재해석한 일러스트를 제작중이다. 사진 아름다운재단

보호종료아동 손자영(24)씨는 미디어 속 보호종료아동 등장 장면을 당사자 시선으로 재해석한 일러스트를 제작중이다. 사진 아름다운재단

손씨는 "미디어에서 먼저 보호종료아동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청년으로 보여주고,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캐릭터로 그려낸다면 보호종료아동에 대한 인식 개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손씨는 그러면서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가치를 담아내는 데 미디어가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며 "대중들은 미세먼지같이 본인도 모르게 (미디어를)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에 미디어의 변화가 먼저 이뤄졌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손자영씨는 앞으로 다른 보호종료아동들과 함께 미디어 속 보호종료아동이 차별받는 장면 등을 당사자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일러스트를 제작해 언론사와 영화사 등 미디어 종사자에게 전달할 계획이다.

권혜림 기자 kwon.hye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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