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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비즈니스 현장에 묻다

“구글·카카오·삼성전자 출신 인재들이 속속 중고거래에 모여드는 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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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중고 아닌 취향 파는 번개장터 이재후 대표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당근’은 알아도 ‘번개장터’는 모른다면. 당신은 35세를 넘겼을 가능성이 크다. 동네 사람끼리 중고거래하게 도와주는 앱 당근마켓(2015년)보다 4년 앞선 2011년 국내 첫 모바일 기반 중고거래 플랫폼으로 등장한 번개장터는 (비록 철없는 범죄이긴 하지만) 어린 미혼모가 자기 아이까지 매물로 올릴 정도로 국민 앱 반열에 오른 강력한 경쟁자(당근)에 가려 한동안 상대적으로 저조했다. 메종키츠네같은 패션 브랜드에 열광하지만 그걸 신상으로 구입할 돈은 없는 MZ세대(10~20대)가 꾸준히 번개장터를 기웃거려준 덕분에 지난해 연 거래액은 1조원을 넘겼으나 이용자 수(월 순이용자 수 1000만 vs. 200만)나 대중적 인지도 면에서 모두 당근과는 격차가 꽤 있다.

이미 20조 시장 폭발적 성장 기대 #취향 존중·정리 열풍에 대세로 #사기 막고 불편 줄이는 진화 중 #“투명한 조직이 최고의 복지”

바로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게 이커머스 티몬의 대표를 지낸 이재후 대표(39)다. 올 1월 프랙시스캐피탈파트너스가 창업자 장원귀 대표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한 뒤 이 대표를 영입했고, 그는 두세 달 뒤 560억원 투자 유치와 10월 스니커즈 커뮤니티 풋셀 인수 등 번개장터가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하나하나 다지고 있다. 서울과학고, 서울대 산업공학과(※수석 졸업이라고 한다), 스탠퍼드 MBA를 나와 경영 컨설턴트(베인앤컴퍼니)를 거친 엘리트가 왜 사기 거래로 악명높은 중고시장에 뛰어들었을까. 그리고 번개장터는 이 대표 합류 이후 얼마나 달라졌을까. 이런 궁금증, 더 정확히는 이 대표가 혹시 번개장터를 그저 한몫 두둑이 챙길 수단으로만 삼는 CEO는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안고 서울 서초동 번개장터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공격적인 질문을 많이 던진 이유다. 다음은 일문일답.

약속보다 조금 일찍 번개장터 사무실에 도착했더니 복도에서 이재후 대표를 마주쳤다. 마침 정리 예능 ‘신박한 정리’에 출연했던 배우 윤은혜와 방송인 오정연이 내놓은 명품 옷과 타이어가 쌓여있어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우상조 기자

약속보다 조금 일찍 번개장터 사무실에 도착했더니 복도에서 이재후 대표를 마주쳤다. 마침 정리 예능 ‘신박한 정리’에 출연했던 배우 윤은혜와 방송인 오정연이 내놓은 명품 옷과 타이어가 쌓여있어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우상조 기자

2018년 10월 티몬 대표가 된 지 2년도 되지 않아 번개장터로 옮겼다.
“어떻게 고객을 만족하게 할지 관점이 달랐다. 난 티몬의 장기인 박리다매보다 취향 거래에서 가능성을 봤다. 처음엔 작은 의견차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원래 중고거래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제안이 왔을 때 망설이지 않았다.”
TV를 통해 처음 접한 후 사용해보니 당근보다 불편하고 불안하던데. (※번개장터는 tvN 정리 예능 ‘신박한 정리’의 협찬사다.)
“35세를 기점으로 인지도 차이가 크다. 패션과 디지털 부분이 강하다 보니 35세 아래로는 만족하는 고객이 더 많다. 다만 아직은 체력(잠재력)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안타까운 서비스인 것만은 분명하다. D사(※이 대표는 당근 대신 계속 이렇게 불렀다)도 매력적이지만 우리도 상당한 잠재력이 있다. MZ세대는 중고거래를 트렌디한 취향 소비로 받아들인다. 취향에 들어맞는 물건은 강남 3구를 제외하면 좁은 우리 동네가 아니라 넓은 전국에서 더 많이 나온다. 모든 온라인 서비스는 누군가 대행해주는 방향으로 간다. 또 사람들은 귀찮은 걸 싫어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직거래보다 비대면 방식이 성장할 거로 본다. 우리는 우리만의 길을 가면 된다.”
그 길이 뭔가.
“사람들이 중고거래를 하는 건 싼값에 취향을 충족시키고 싶거나 요즘 트렌드인 공간을 비우면서 돈도 벌겠다는 마음 아닐까. 지금은 우리가 잘하는 취향 거래에 집중하고 있지만 부동산 가격 급등으로 사는 공간이 좁아지다 보니 정리에 따른 중고거래 잠재력도 모른 체할 수 없다. 사실 둘을 떼서 생각하기 어렵다. 정리하려고 내놓기는 해도 처치 곤란 취급하는 대신 내 취향을 알아보는 사람에게 팔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 않나. 결국 취향 거래로 이어지는 셈이다. 예능 프로그램 협찬을 한 것은 인지도를 높이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방송 전후로 35~44세 인지도가 14%포인트 올랐다) 정리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직거래가 아니라면 고객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인사이트를 키우려는 측면이 더 컸다.”
사무실 한켠에 있는 스낵 창구. 주기적으로 공급해주는 앱 서비스를 이용하는데 직원 만족도가 높다고 한다. 우상조 기자

사무실 한켠에 있는 스낵 창구. 주기적으로 공급해주는 앱 서비스를 이용하는데 직원 만족도가 높다고 한다. 우상조 기자

사기는 중고거래의 고질병이다. 당근은 직거래로 문제를 해결했는데.
“사기는 번개장터만이 아닌 중고거래 시장의 문제다. 지금은 신뢰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약하지만 하나씩 고쳐나가면 된다. 지난 7월 도입한 완전 본인 인증(주민등록 번호 인증) 등 사기를 막는 기술적 노력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사기 전력 사용자를 자동 차단하는 시스템도 있다. 중고거래 특성상 거래 당사자들이 톡으로 대화를 할 수밖에 없는데 번개장터 플랫폼 밖에서 대화하자고 하면 위험한 거다. 대화 중 ‘ㅋr톡’이라는 조합어가 나온다든지 카톡 아이디를 종이에 쓴 사진을 교환하면 위험신호로 보고 당사자에게 알려준다. 꼭 해야 하는데 아직 취약한 이런 부분에 지난 6개월 동안 정말 많이 투자했다.” 
투자받은 돈을 여기에 쓴 건가.
“아니다. 그건 내부 개발로 해결했다. 지금까지는 주로 인재 전쟁에 썼고, 4분기 중으로 과감한 마케팅을 할 계획이다. 우린 직거래가 아닌 포장 배송 형태의 거래라 불편하게 느끼는 고객이 많은데 이걸 해결하는 유료 서비스도 11월 중에 특정 지역에 한해 테스트 형식으로 내놓을 방침이다.”
인재 전쟁?
“플랫폼 비즈니스를 경험한 기획자와 개발자는 정말 드물다. 내 업무시간의 3분의 1, 많게는 절반을 인재 확보나 직원과의 대화에 할애한다.”

※이 대표가 영입한 하버드 MBA 출신 최재화 최고마케팅책임자(CMO)는 구글코리아에서 유튜브 마케팅 총괄을 했고, 정용준 최고제품책임자(CPO)는 네이버를 거쳐 카카오스토리 사업부장과 SNS 사업본부장을 했다. 삼성전자 소프트웨어R&D센터 빅데이터연구소 출신으로 빅데이터 스타트업 부스트를 창립한 이동주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지난해 부스트가 번개장터에 인수되면서 다른 삼성전자 출신 인재들을 이끌고 이 대표보다 앞서 합류했다.

어떻게 이런 인재들을 모았나.
“사실 좋은 아이디어는 대부분 실패한다. 제로에서 만들기는 그만큼 어렵다. 경험 있는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큰 시장(※업계에선 15조~20조원으로 추산, 이커머스 최강자 쿠팡이 내년 상반기 중고거래 서비스에 뛰어든다는 보도도 있다)이고 앞으로 더 폭발적으로 성장할 중고거래 시장의 미래를 감각적으로 알아챘을 거다. 번개장터는 뭔가 부족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 수 있을 거라 봤을 거다. 중고거래에 사기가 많다고 안 가는 게 아니라 ‘내가 가서 사기꾼 다 잡아버려야지’라는 DNA를 가진 사람들이다.”
혹시 복지가 좋아서는 아닐까.
“일 할 기회 자체가 복지다. 어떨 때 일을 안 하고 싶어질까 고민해봤다. 왜 하는지 모를 때 아닐까. 우리 회사는 모든 정보를 완전히 투명하게 공개한다. 사무실 한복판에 모든 주요 데이터를 보여주는 모니터를 설치하고 지라(Jira)나 콘플루언스(Confluence) 같은 모두에게 개방된 여러 협업 툴을 쓰는 것도 이런 이유다. 복지보다 투명성이 좋아야 인재를 모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자부심이 있다. 인사 파트에서 직원 설문을 했는데 면담할 때 조직장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나, 조직장은 솔직한 생각을 말하나 등의 질문에 90% 이상이 ‘그렇다’고 답했다. 직원들이 회사를 개방적이고 안전한 곳이라고 느낀다는 얘기다.”
의사 집안 출신에 창업가 정신이 넘치는 스탠퍼드 MBA 출신이다. 왜 의사가 되거나 창업을 하지 않았나.
“증조할아버지부터 대대로, 친가 절반이 의사다. 이런 분위기에 밀려 의사가 된 아버지는 오히려 ‘의사만 하지 마라’고 하셨다. 대학 재학 중 병역특례로 간 회사에서 신규개발팀장을 맡아 우연히 만든 프로젝트 관리 모듈이 너무 쉽게 팔렸다. 회사 대표가 대기업도 쓸 수 있는 인사 관리 소프트웨어를 만들라고 격려했다. 잘 만든 줄 알았는데 영업 발표 날 문의가 한 건도 없었다. 너무 창피했다. 비즈니스를 알아야겠다 싶어서 졸업 후 컨설팅회사에 갔고, 기업가 정신이 뭔지 알고 싶어 스탠퍼드에 갔다. 딱히 아이템이 떠오르지 않는 상태에서 창업은 늘 고민거리였다. 그런데 MBA 수업에 온 한 기업가가 ‘창업은 사업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걸 구현하는 것도 기업가 정신’이라는 게 아닌가. 묵은 딜레마에서 탈출하는 느낌이었다. 스탠퍼드가 굉장히 좋았던 게 업계 트렌드보다 ‘진정한 나를 스스로 이해해야 한다’는 식의 철학적 수업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 스스로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고 커리어를 선택할 때 머리보다 마음이 가는 길을 택했다. 다만 지금이 정점인 것 같은 잘 나가는 곳보다 가능성은 있는데 뭔가 부족한 곳을 골랐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곳, 번개장터가 바로 그랬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