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오래]인생 2막은 명랑 판타지 ‘보건교사 안은영’처럼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현주의 즐거운 갱년기(48)

'보건교사 안은영'에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욕망을 드러내는 괴물 젤리, 이것에 영향을 받는 섬약한 학생, 그리고 광선검과 비비탄총으로 젤리를 무찌르며 학생을 보호하는 보건교사가 등장한다. [사진 넷플릭스]

'보건교사 안은영'에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욕망을 드러내는 괴물 젤리, 이것에 영향을 받는 섬약한 학생, 그리고 광선검과 비비탄총으로 젤리를 무찌르며 학생을 보호하는 보건교사가 등장한다.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보건교사 안은영’을 정주행했다. 정세랑 작가의 원작과 이경미 감독의 연출이 어떤 식으로 만났는지도 궁금했고, ‘더 이상의 안은영은 없다’는 평가를 받은 정유미의 연기에도 호기심이 생겼지만 장시간 TV 앞에 앉아 있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 이렇게 6편을 내리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 드라마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욕망을 드러내는 괴물 젤리, 이것에 영향을 받는 섬약한 학생, 그리고 광선검과 비비탄총으로 젤리를 무찌르며 학생을 보호하는 보건교사가 등장한다. ‘명랑판타지’라는 설명대로 낯설지만 매력적인 캐릭터와 미장센, 스토리다. 어떤 욕망의 젤리가 나올지, 어떤 방식으로 보건교사가 그 젤리를 없애게 될지를 기대하며 계속해서 다음 화를 눌렀다.

드라마를 끄지 못하고 계속 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젤리를 보는 능력이 못마땅하고 젤리를 해치워야 하는 상황에 회의를 갖기는 하지만 언제나 그 능력을 기꺼이 쓰고야 마는 안은영이 가진 매력 때문이었다. 이 드라마는 일종의 여성 히어로물인데,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할리우드 영화에 나올법한 대단한 신체 능력을 가진 여전사가 아닌 가냘프고 엉뚱한 여선생님이 그 주인공이다. 학생을 돕겠다는 마음 하나로 비비탄 총을 들고 달려가는 선생님, 가끔은 자기가 왜 이러고 사는지 고민하지만 학생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보면 다시 한번 박차고 일어나 광선검을 꺼내 드는 마음 약한 선생님이 영웅으로 등장한다.

세상 어떤 사람이든 욕망으로 인한 고통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을 치유해주며 별일 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지켜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판타지를 보는 것도 즐거웠고, 위험을 해결하는 당사자가 평범해 보이는 보건교사라는 점도 몰입할 수 있는 이유가 됐다.

우먼센스와의 인터뷰에서 정세랑 작가는 히어로에 대해 “약한 사람을 돕기 위해 자기 이익을 내려놓는 사람, 이해받지 못하고 오해만 받아도 계속해나가는 사람, 보편적인 것과 어긋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보상을 바라지 않으면서 세계에 친절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보통 사람들이 아주 용감해질 때가 있는 데 그런 점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한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사람, 남이 보기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그 일을 해내는 사람을 보면 고개를 주억거리며 감동하곤 한다.

드라마를 계속 본 이유는 젤리를 보는 능력이 못마땅하고 젤리를 해치워야 하는 상황에 회의를 갖기는 하지만 언제나 그 능력을 기꺼이 쓰고야 마는 안은영이 가진 매력 때문이었다. [사진 보건교사안은영 스틸]

드라마를 계속 본 이유는 젤리를 보는 능력이 못마땅하고 젤리를 해치워야 하는 상황에 회의를 갖기는 하지만 언제나 그 능력을 기꺼이 쓰고야 마는 안은영이 가진 매력 때문이었다. [사진 보건교사안은영 스틸]

비슷한 연배의 친구가 나에게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인생 1막인 젊은 시절에는 나의 성취와 성장에 몰두했던 시기라면, 두 번째 막이 시작되는 지금부터는 살아가는 의미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두고 싶어. 나이 들어서까지 나에게 몰두하는 삶이 의미 있거나 즐거울 것 같지 않거든.”

나 역시 동감한다. 나를 위한 에너지는 쓸 만큼 썼고, 지금부터는 조금 다른 에너지를 가지고 주변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말이다. 그래야 방전되지 않고 새롭게 충전될 수 있을 것 같다.

얼마 전 뉴스에서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광선검을 든 보건교사 복장을 하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는 1인시위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심 의원은 “보건교사 안은영의 마음으로 우리 곁의 평범한 삶을 지키는 시민 히어로가 되어 달라.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처리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 달라”고 촉구했다.

어떤 의도로 그런 복장을 하고 메시지를 전달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평범한 삶을 지키는 시민 히어로. 아픈 학생의 몸과 마음을 치료해주는 보건교사 안은영처럼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소리 내고 달려갈 수 있도록 마음속 에너지 충전을 해야겠다.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하다 보면 비록 광선검은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젤리를 없앨 수 있지 않을까.

우먼센스 편집국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