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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 칼부림 안인득 "난 조현병 아냐"…판사 왜 '심신미약' 봤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19년 4월 19일 진주경찰서는 진주 묻지마 살인사건의 피의자 안인득의 얼굴을 공개했다. 송봉근 기자

2019년 4월 19일 진주경찰서는 진주 묻지마 살인사건의 피의자 안인득의 얼굴을 공개했다. 송봉근 기자

2019년 4월 17일 아직 대부분 잠들어있을 시간인 새벽 4시 25분. 안인득(43)은 자신의 집에 휘발유를 뿌리고 스스로 불을 질렀다. 안씨가 살던 아파트는 곧 아비규환이 됐다. 그는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연기를 피해 대피하는 이웃들을 향해 미리 준비한 칼을 휘둘렀다. 3층에서 한 여성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2층에서 탑승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가 공격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5명이 사망했고 17명의 피해자가 상해를 입었다. 피해자들은 모두 여성이나 노약자였고, 사망자 중에는 12살, 19살의 미성년자도 포함됐다. 살아남은 이들도 영구적인 성대 마비, 신경 장애, 좌측 신체 부위 마비, 공황장애 등을 겪으며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

1심 “조현병은 인정, 심신미약은 아냐”

흉기난동 사건이 발생한 경남 진주시 한 아파트 방화 현장. [연합뉴스]

흉기난동 사건이 발생한 경남 진주시 한 아파트 방화 현장. [연합뉴스]

1심 재판부는 안씨가 자라온 환경부터 살폈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안씨는 31살에 한 공장에서 조립 업무를 하다가 허리를 다쳤지만 산재보험이 가입되어 있지 않아 산업재해로 처리되지 않았다. 산재 인정에 집착하던 그는 이후 회사 관계자들이 자신을 쫓아다니며 감시한다는 생각을 가졌고, 이로 인해 가족들과도 불화가 생겨 따로 살게 됐다. 그러다 2010년 첫 범행이 발생한다. 회사에서 자신을 감시하라고 보낸 사람이라며 상관없는 사람에게 칼을 휘두른 것이다. 조현병 진단을 받고 강제입원 조치 됐던 안씨는 2016년 외래진료를 받다가 자신을 신경과민이라고 치부하는 병원에 불만이 생겨 치료를 중단했다.

그렇게 2017년 진주의 아파트로 이사 온 그는 이웃들이 자신을 욕하고 괴롭힌다고 생각했다. 특히 한 가족이 이를 주도한다며 집 앞에 오물을 뿌리거나 계란을 던지는 등의 행동을 해왔고, 오물이 자신의 집에도 튀었다고 항의한 다른 이웃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이러한 사정을 종합한 1심은 안씨에게 조현병의 정신장애가 있고, 그로 인한 피해망상, 관계망상 등을 보이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사건 범행 당시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미약한 정도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보지는 않았다. 범행을 결심하고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했고, 실행을 위해 범행 도구를 사전에 준비했으며 범행 수법 또한 매우 잔혹했기 때문이다.

안씨는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현행법상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경우 복역 20년이 지나면 가석방이나 사면을 통한 석방의 기회가 생긴다. 1심은 “무기징역형은 개인의 생명과 사회 안전의 방어라는 점에서 사형을 온전히 대체하기 어려워 보인다”며 “법정 최고형을 선고함이 마땅하다”고 밝혔다.

“나는 조현병 아니다” 심신미약 인정된 근거들

진주 살인사건 희생자들의 장례식이 2019년 4월 23일 진주 한일병원에서 엄수됐다. 피해자 A양(12)의 유해가 학교를 방문하자 친구들이 울먹이고 있다. [뉴스1]

진주 살인사건 희생자들의 장례식이 2019년 4월 23일 진주 한일병원에서 엄수됐다. 피해자 A양(12)의 유해가 학교를 방문하자 친구들이 울먹이고 있다. [뉴스1]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안씨의 심신미약 주장을 받아들였고, 그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첫 번째 근거는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대검찰청 심리분석관은 안씨가 ‘이웃 주민들이 단체로 짜고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관계 망상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판단했다. 치료감호소의 정신감정에서도 “형사 책임 능력에 대하여 범행 당시 및 현재까지 의사결정 능력이 저하된 심신미약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결과가 나왔다.

안씨가 스스로 “나는 조현병이 없다”는 취지의 진술을 한 점도 오히려 그가 심신미약이라는 근거가 됐다. 감경을 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진술을 꾸민다기보다 자신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떠나 생각나는 대로 진술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게 2심의 판단이다.

검찰은 범행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심신미약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안씨가 평소 앙심을 품었던 피해자는 끝까지 쫓아가 공격한 반면 그렇지 않은 이웃은 그냥 보내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심은 “안씨가 화가 치밀어 공격한 기억은 있으나 구체적인 정황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위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우리 사회에도 책임이 있다”

2심은 안씨의 가족이 그를 입원시키려 노력했으나 방법이 없어 포기한 점을 들어 사회적 책임도 거론했다. 재판부는 “안씨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해 이러한 비극이 일어난 것에 대해 우리 사회에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며 “심신미약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른 이에게 이성적이고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취급해 사형을 선고하는 것은 가혹한 면이 있다”고 판시했다.

대법원도 이와 같은 판단을 내리면서 안씨는 무기징역형이 확정됐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은 29일 “안씨가 이 사건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다고 보아 감경을 한 후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에 잘못이 없다”고 밝혔다.

이가영 기자 lee.g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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