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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분점 냈어요?" 부산 '해운대암소갈비집'의 401km 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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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다]-판결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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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km. 부산의 유명 식당 ‘해운대암소갈비집’과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위치한 ‘해운대암소갈비집’을 자동차로 이동했을 때 거리입니다. 우리나라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야 할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식당이 소송전에 들어간 건 지난해입니다. “사장님, 서울에 분점 내셨어요?”라는 질문을 수없이 받은 부산 식당 주인이 서울 식당 주인을 상대로 “간판을 내리라”며 소송을 낸 것이죠. 55년 전, 아버지 대부터 이어오던 식당 이름과 메뉴를 서울 식당이 그대로 베꼈으니 이를 못 쓰게 해달라는 소송이었습니다.

1심에서는 부산 식당이 졌습니다. ‘해운대암소갈비집’이라는 가게 이름은 지명에 상품 종류만 붙인, 특별할 것 없는 이름이라는 거죠. 부산에선 유명한 식당이지만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서 서울에 사는 사람들도 쉽게 다른 가게와 구분할만한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한 겁니다.

그런데 최근 서울고등법원 민사5부(부장판사 김형두, 박원철, 윤주탁)가 이 판결을 뒤집었습니다. 1ㆍ2심 판결 1년 사이 두 가게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진 것도 아닌데 무엇이 달라진 걸까요.

400km 넘게 떨어진 두 식당…혼동할 소비자 있을까?

해운대암소갈비, 2심판결사유.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해운대암소갈비, 2심판결사유.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항소심이 주목한 건 바로 ‘맛집 탐방 여행’과 ‘온라인 정보’였습니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국내 여행객 중 ‘음식 여행’을 떠나는 여행객의 비중은 34.7%(2017년 기준)라고 합니다.  TV만 켜면 맛집 프로그램이 나오는 요즘, 그 비중은 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죠.

부산 식당측은 리서치기관에 의뢰해 설문조사도 해봤습니다. 올해 7월 3~5일까지 주말 3일 동안 부산 식당에 방문한 손님 약 540명에게 “어느 지역에서 오셨냐”고 물어본 겁니다. 응답자의 63.8%가 “부산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이 식당을 찾아 왔다”고 답했습니다. 거기다 이들 중 40%는 “서울이나 경기지역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서울 식당과 생활권이 겹치는 곳이죠. 또 시민들 1000여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조사도 해봤습니다. “지방의 유명 맛집이 서울에 분점을 내면 갈 의향이 있냐”고 묻자 89.1%의 시민이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이런 점을 살핀 항소심은 “두 식당은 각각 부산과 서울에 위치하지만 서로 경쟁 관계에 있거나 가까운 미래에 경쟁 관계에 놓일 가능성이 있다”며 “서울 식당이 부산 식당의 경제적 이익을 침해하고 있다”는 판단을 합니다.

또 과거와는 달리 인터넷 뉴스나 블로그ㆍSNSㆍ유튜브 같은 온라인상 정보로 식당을 찾는 손님들이 많다는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고도 봤습니다. ‘해운대암소갈비집’이라는 가게 이름의 재산적 가치를 평가할 때 예전 같았으면 영향력의 범위가 지리적으로 한정됐겠지만, 지금은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항소심은 “특정 지역에만 집중적으로 알려진 상표나 영업표지도 온라인 정보의 양과 질에 따라서는 다른 지역 손님들에게까지 그 영향력이 급속하게 전파되고 공유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실제 서울 식당에 방문했다가 “기대보다 못하다”며 SNS에 글을 올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서울 식당을 부산 식당의 분점으로 오해해서 생긴 일이죠. 항소심은 이를 "서울 식당이 부산 식당 손님들을 대체하며 경제적 이익을 침해하고 명성을 훼손하는 정황이 된다"고 봤습니다. 최근 요식업 분야에서 지방에서 성공한 맛집들이 백화점에 들어오거나 분점을 내서 서울에서 큰 성공을 거두는 것이 새로운 경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본 것이죠.

간판·불판·곁들임 메뉴도 '유사'

1심에서 인정되지 않은 가게 이름의 상표성과 간판의 유사성, '감자 사리'라는 메뉴의 유사성도 2심에서 인정됐습니다. 1심은 두 식당의 간판 모양에 대해 "검은 바탕에 흰색 한글 서예체 간판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간판"이라며 부산 식당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고 봤습니다.

두 식당이 쓰는 불판 모양도 여느 고깃집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모양이어서 부산 식당만의 식별력을 높이지는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곁들임 메뉴인 '감자 사리'에 대한 판단도 달랐습니다. 부산 식당에서는 갈비를 구운 불판 가장자리에 감자 사리를 넣어 끓여주는데, 서울 식당도 똑같았습니다. 1심은 "감자로 된 면이긴 하지만 보통의 고깃집에서도 냉면 사리처럼 쫄깃한 식감의 국수를 주지 않느냐"며 부산 식당만의 특이한 점으로 볼 수 없다고 봤습니다.

해운대암소갈비, 주요쟁점.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해운대암소갈비, 주요쟁점.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하지만 2심은 "두 식당의 간판·불판·곁들임 메뉴는 매우 유사하다"며 "서울 식당은 부산 식당의 명성과 신뢰도에 무단으로 편승하려고 부산 식당과 똑같은 가게 이름 등을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판결했습니다. 간판과 감자 사리 등의 메뉴를 부산 식당이 쌓아온 '성과'로 인정할 수 있다고 본 항소심은 "서울 식당은 공정한 상거래 관행이나 경쟁 질서에 반하는 부정경쟁행위를 했다"며 서울 식당의 간판 등을 모두 내리고 더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했습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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