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낙태 시술 방법으로 약물 요법을 허용하는 개정안을 입법 예고하자 낙태약 조제권을 두고 의료계와 약사계의 물밑 '샅바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의료계는 여성의 사생활 보호 등을 위해 병원 내에서 낙태약 조제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약사계는 낙태약이 의약 분업의 예외 조항이 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정부 개정안 통과시 ‘먹는 낙태약’ 가능
정부는 지난 7일 임신 초기인 14주까지 임신중단(낙태)을 허용하는 법률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개정안은 낙태 방법으로 현행법상 허용하고 있는 수술 외에 자연 유산을 유도하는 약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먹는 낙태약’으로 불리는 ‘미프진’ 등의 처방이 가능해진다.
갈등의 핵심은 낙태약 조제권이다. 28일 의약계에 따르면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직선제)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등 의사단체는 최근 보건복지부에 낙태약을 의약분업의 예외 약품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지난 2000년부터 시행한 의약분업에 따라 의사가 진료 후 의약품을 처방하면 약사는 이에 따라 약을 조제한다. 하지만 낙태약은 예외 약품으로 지정해 의사가 직접 조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의료계 “여성 프라이버시 존중 필요”
김동석 대한산부인과의사회(직선제) 회장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의약분업을 깨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프라이버시권을 존중하자는 의미에서 의견서를 제출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여성 입장에선 낙태한 것이 주변에 알려지는 것을 꺼린다”며 “현재 정신과 약은 병원에서 곧장 조제해 주는 것처럼 낙태약 역시 병원에서 받아갈 수 있게 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의사단체는 불법 유통을 근절하고 불완전 낙태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낙태약이 예외 약품으로 인정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 회장은 “약국에서 어떻게 관리가 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병원의 경우 약 한 알이 들어오고 나가는 과정을 전부 정확하게 관리한다. 낙태약이 전국 약국에 깔리면 도매상이 유통하는 과정에서 불법 유통될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약사계 “분쟁할 문제 아냐…규정대로 가자”
약사계는 의사 직접 조제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대한약사회 관계자는 “약사와 의사가 분쟁하고 다툴 문제가 아니다. 기존의 법 규정에 적용되는지만 따지면 된다”고 말했다. 약사법 제23조 4항에 따르면 의약분업 예외 약품으로 지정될 수 있는 건 ▶약국이 없는 지역 ▶재해가 발생할 경우 ▶응급환자 또는 정신질환자에 대해 조제하는 경우 ▶입원환자에 대해 조제하는 경우 등이다.
익명을 요청한 약사계 관계자는 “낙태약이 예외 규정에 해당하면 인정을 하겠지만 합당한 명분이 없다. 이렇게 예외 규정이 많아지다 보면 의약분업의 주객이 전도되는 격”이라고 말했다. 환자의 사생활 보호 등에 대해서도 “다른 질병의 경우 이런 사례가 없을까. 환자의 사생활 보호가 목적이라면 그 어떤 질병도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다”면서 “병원에서만 약의 관리가 철저하게 이뤄질 수 있다는 주장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우림 기자 yi.wool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