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한국 SF 원년 2020을 생각하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강혜란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강혜란 문화팀 차장

강혜란 문화팀 차장

올해 대중문화계는 한국 SF의 원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년 전부터 SF문학 바람이 불었던 출판계는 물론이고 방송·영화계에서도 대중의 눈길을 끄는 시도가 적지 않았다. 얼마 전 MBC와 OTT 플랫폼 웨이브가 손잡고 영화 인력을 기용한 ‘SF8’ 시리즈는 ‘우주인 조안’ 등 화제작을 낳았다. 올해 7회를 맞은 춘천영화제는 SF장르 특화를 선언하고 지난 15일부터 나흘간 실험적인 문제작을 대거 상영했다. 총제작비 240억원대 SF블록버스터 ‘승리호’는 넷플릭스 직행 가능성이 크다지만 우리식 복제인간을 그린 또 다른 SF영화 ‘서복’이 연말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2020년은 지난 세기 창작자들이 궁금해 한 미래였다. 1980년대 말 방송된 ‘2020 원더키디’는 지금도 유튜브에서 사랑받는 국산 애니메이션이다. 그보다 앞서 1970년 동아일보는 창간 50주년을 맞아 소설가 김승옥에게 의뢰해 SF소설 ‘50년 후, 디 파이 나인 기자의 어느 날’을 실었다. 2020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놀랍도록 우리의 현재와 닮은 데가 있다. 연료전지로 가는 자율주행 자동차, 화상 통화 등 신기술이다. 세계 첫 시험관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인데 인공 자궁을 통한 출산까지 묘사했다. 이 같은 상상력에 경의를 표하며 요즘 작가들이 다시 미래를 상상한 소설집 『SF 김승옥』도 최근 출간됐다.

노트북을 열며

노트북을 열며

올해 유독 SF가 뜨거운 것은 코로나19 팬데믹 속에 우리 삶이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불안감이 작용했을 테다. 『SF 김승옥』에 실린 강병융의 단편 ‘아빠는 오늘을 좋아합니다’가 이를 잘 보여준다. 전염병 ‘디파이’가 창궐하고 30년 뒤인 2050년, 가족 외엔 모두 비대면 관계가 된 세상에서 아빠가 가상현실 프로그램을 통해 몇 번이고 돌아가는 날은 2019년의 평범한 봄날이다. 길을 걸어 학교를 가고 눈을 마주치며 강의를 하고 사람들과 식사를 즐긴 그런 날 말이다.

아무리 알 수 없는 미래라 해도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이 쌓여 수백 년 단위 변화를 초래한다. 지난달 나온 SF옴니버스 소설집 『팬데믹』 속 배명훈의 단편 ‘차카타파의 열망으로’는 이를 재치 있게 표현했다. 2113년 배경의 소설은 읽다 보면 기묘한데 ‘ㅊ’ ‘ㅍ’ 같은 거센소리가 모두 순화돼 표기됐다. 예컨대 플레이오프가 블레이오브다. 비말 감염을 경계하는 세태가 음가와 맞춤법 변화를 일으키리라는 상상이다. ‘통촉하시옵소서’가 ‘동족아시옵소서’로 바뀐 세상. 그때쯤엔 침 튀기며 싸우는 일도 사극의 한 장면이 됐을 테니 볼썽사나운 여의도 정치인들 풍경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 그땐 ‘정지인’들이려나.

강혜란 문화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