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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아버지 10년 소원 이룬 고향 보길도 ‘번개’여행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푸르미의 얹혀살기 신기술(32)

“아버지 모시고 목포나 보길도에 다녀오려고 해. 드시는 약이랑 속옷 좀 준비해 줄래?”
언니 2의 전화였다. 반가우면서도 투병 중인 언니가 오랜 시간 운전해서 가는 것이 맞는지 판단이 어려웠다.

“약은 챙겨놓을게. 아마 언니 힘들다고 안 가실 거야. 아침에 와서 설득은 해봐. 절대 무리는 하지 말고.”
비겁했다. 내심 고마우면서도 언니 건강에 무리 될까 대놓고 환영은 못 하는. 그러나 언젠가 보길도에 가고 싶어 하는 아버지 마음을 아는 나로선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아버지 속옷과 마스크, 약 등을 챙겨 놓고 출근했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 전화가 울렸다. 아버지였다. 언니 등쌀에 못 이겨 목포로 출발한다 하시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세 톤 정도는 더 높게 들렸다. 이후 2박 3일간의 여정은 언니2의 글로 정리해 보았다.

“어머니 묘도 돌봐야 하고, 형수님도 한 번 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고향 가기는 틀린 것 같다.”
아버지는 명절이 다가오면 늘 같은 말씀을 하셨다. 거동이 불편해진 올해는 한 가지 더 추가되었다.
“헬기 타면 갈 수 있으려나?”

아버지 고향은 보길도다. 중고등학교를 다닌 목포는 제2의 고향이다. 대학 다닐 때 뒷바라지해 주셨던 형수님이 지금 목포에 사시고, 할머니 묘소는 보길도에 있다. 교통편이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대중교통을 이용해 가려면 버스와 지하철, 기차 또는 고속버스, 그리고 시외버스와 배까지, 여러 번 갈아타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아버지는 바쁜 딸들에 폐가 될까 나 좀 데려가다오 직접 말씀은 못 하시고, “이렇게 늙고 병든 몸으로 고향 가면 누가 환영하겠냐? 가면 신경 쓸 일 많아서 안 간다” 하셨다. 그런 분이 ‘헬기라도 동원해 가고 싶다’ 할 정도가 되면 그 소원을 풀어드릴 때가 되었다 판단했다. 올봄 뇌졸중이 발병했고, 폐암 치료도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미룰까도 생각했으나, 지금 하지 않으면 나에게도 두고두고 후회될 것 같았다.

미리 계획을 말씀드리면 못 가는 이유를 수도 없이 대실 것 같아 여행 준비를 아예 다 해 가지고 가서 출발 직전에 말씀드렸다. 요즘 말로 ‘번개’였다. 아버지는 “네가 어떻게 그 먼 길을 운전해서 가니? 절대 안 간다!” 말씀하시면서도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셨다.
“네 성화에 어쩔 수 없이 간다만, 먼 길을 네가 어떻게 가려는지 걱정이다.”

아버지는 차에 오르시더니 신용카드와 지폐를 꺼내 운전대 옆에 슬쩍 올려두셨다.
“여행 기간 중 네 돈은 한 푼도 쓰지 말고 이것으로 다 처리해라.”
힘 있는 목소리와 소풍 가는 학생 같은 들뜬 표정이 그대로 읽혔다.

아버지는 내가 긴 시간 운전하는 것이 지루할까 봐 옛 추억을 들려주셨다. 농협에 입사해 비금도에 근무할 때 첫 딸을 낳았는데,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무실에 들어와 직원들 구두를 모두 “아빠 것!” 하면서 들고 가버려 동료들을 당황하게 했던 일, 도시에서 자라 아무것도 모를 줄 알았던 어머니가 가마솥 땔감을 구하러 갔는데, 욕심껏 모으다 보니 도저히 혼자 들고 내려올 수 없어 결국 땔감 뭉치를 발로 차 굴려 가며 산에서 내려와 섬 주민들을 놀라게 했다는 무용담까지. 이 정도 기억력이라면 오랫동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내심 안도가 되었다. 목포에 먼저 들러 형수님 뵙고, 친지들과 저녁 식사라도 하자 하셨는데, 웬걸, 도착하자마자 목포 해상케이블카를 타러 가자고 하셨다.

‘그동안 하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이 많으셨구나!’

어머니 생전에 두 분은 자주 여행을 다니셨다. 혼자되신 지 10년 넘도록 고향에도 한 번 모시지 못한 것이 새삼 아프게 다가왔다. 형수님 뵙고 준비한 용돈을 드리고, 친구들과 만나 술도 한 잔 드셨다. 공교롭게도 모두 아버지와 같이 상처(喪妻)하고 혼자된 분들이어서 공감대가 더 큰 듯했다. 그중 한 분이 “3년만 더 살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하자, 다른 한 분이 “10년도 더 전부터 그 말을 들어왔네, 자네도 참 욕심이 끝도 없네” 하며 받아쳐 크게 웃었다. 헤어질 땐 맞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꼭 다음에 만나자며 아쉬워하셨다.

숙소로 향하는 길, 아버지는 갑자기 “보길도 사는 조카에게 전화해서 혹시 벌초를 안 했다면 오늘 밤이라도 당장 해 놓으라고 해라”하시는 게 아닌가. 진심이신가 싶어 표정을 살폈다. 집안에 마지막 남은 어르신 노릇을 톡톡히 하시려는 듯해 당황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묘에 가서 뵙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요즘 세상에 어떤 이가 당신 친부모 묘도 아닌데 이 밤에 벌초를 대신 해 주겠는가.

“추석 전에 다 했을 거예요. 아버지, 가서 보시고 부족한 점 있어도 말씀하시지 마시고 고생했다 잘했다고만 하시는 게 좋겠어요.” 부탁을 단단히 드렸다. 다행히 아버지는 늦은 시각 잠자리에 드시면서도 피곤한 내색은커녕 “오늘 참 많은 일을 했다!” 하시며 흐뭇해하셨다.

처음 계획은 둘째 날 아침 일찍 보길도로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이 역시 실행되지 못했다. 아버지는 보길도로 향하던 차를 1004대교로 돌리라 하셨다. 예전엔 배를 갈아타야만 갈 수 있던 1004개의 섬이 다리로 연결되었으니, 젊은 시절 근무했던 곳과 단골 막걸리 집에 들러보자 하셨다. 아버지 기억을 더듬어 열심히 찾아갔지만, 근무하시던 사무실은 새 사옥으로 이사해 터만 남았고, 50년 넘게 이어오던 막걸리 집은 코로나19로 올 초 결국 문을 닫았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을 뿐이었다.

오후 늦게야 보길도에 도착했다. 어떻게 소식을 접하셨는지, 아버지를 맞으러 초등학교 동창들이 부두로 달려오셨다. 함께 지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친구 집에 가서 문병까지 마치니 이틀째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해 지기 직전 겨우 할머니 묘소에 도착했다. 그리운 어머니에게 잔을 올리고서야 비로소 고향에 왔다는 게 체감되었는지 아버지는 숙연해지셨다. 이 여행의 최종 목적이 달성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도 잠시, 애써 벌초해 준 조카에게 “수고했다!” 말 한마디 하시고는 바로 “봉분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지적하시며 못마땅한 속내를 드러내셨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또 한 번 당황했지만 그래도 엊저녁에 내가 당부드린 덕에 고맙다는 인사를 그나마 먼저 하신 것이다 위로했다.

해가 저문 뒤에도 아버지의 여정은 계속됐다. 어두운 골목길을 더듬어 친구들과 동생들을 찾아 기억을 소환했고, 이튿날엔 동네 곳곳을 누비며 어르신들을 귀신같이 찾아내셨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문어, 미역, 다시마, 멸치, 전복 등이 차에 쌓여갔다. 아버지가 다니시던 초등학교 골목을 지날 때였다. 길에서 특산품을 파는 한 할머니에게 다가가시더니 대뜸 “나 알아보겠어요? 초등학교 동창인데….” 하시는 게 아닌가. 찬찬히 아버지를 살피던 할머니는 뜻밖에 수줍은 미소로 화답하며 반가워하셨다.

95세 교장 선생님, 91세 이장님 모두 빼놓지 않고 찾아 인사드렸다. 따뜻한 마음과 정성 어린 선물을 가득 안고 보길도를 나오는 길,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또 만나자 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까?’ 아버지는 깊어가는 가을보다 더 깊은 회한에 젖으셨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어머니 산소에서 따온 감나무 가지를 걸어두고 말없이 오래 응시하셨다. [사진 푸르미]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어머니 산소에서 따온 감나무 가지를 걸어두고 말없이 오래 응시하셨다. [사진 푸르미]

차 트렁크에는 보길도 특산물인 미역, 멸치, 전복은 물론, 표고버섯과 집 된장, 직접 담은 유차 청, 심지어 산에서 채취한 난초까지, 뭐라도 들려 보내주고픈 시골인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차 트렁크에는 보길도 특산물인 미역, 멸치, 전복은 물론, 표고버섯과 집 된장, 직접 담은 유차 청, 심지어 산에서 채취한 난초까지, 뭐라도 들려 보내주고픈 시골인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수요일 오전 출발해 금요일 저녁 돌아오신 아버지는 여전히 상기되어 계셨다. 트렁크 속의 풍성한 선물을 자랑하셨고 목소리 톤도 여전히 높았다. 토요일 하루 종일 지난 2박 3일 동안 있었던 일과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로 바쁘셨다. 모처럼 집에 활기가 돌았다.

최상이던 아버지의 컨디션은 단 하루로 끝나고 말았다. 다음 날부터 온몸에 극심한 가려움증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엔 어린 시절 할머니 집에만 다녀오면 이가 옮아서 참빗으로 머리카락을 쉴 새 없이 빗었던 기억이 스쳐 갔다.

공무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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