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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우울증 극복 수기 공모전] 3년 만에 돌아온 가을

중앙일보

입력

여성 우울증 극복 수기 시상식

여성 우울증 극복 수기 시상식

한국에 돌아온 지 정확히 3년이 되는 가을이다.

최우수상 최한나

그리고 지난 3년 동안 나는 내가 아닌 그 누군가였다.

2017년 가을, 나는 임신 36주 차에 만삭의 몸으로 남편 없이 혼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36주는 임산부가 비행기에 탈 수 있는 마지막 주이다. 외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그 당시에 박사 1년 차 학생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학생이다.

당시 우리는 계획하지 않은 임신으로 급하게 결혼을 하게 되었다. 2017년 2월 임신 소식을 알게 되었고, 2017년 5월에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예상치 못한 임신 소식에 축하보다는 질책을 들었다. 그때부터 나의 우울증은 시작된 듯하다.

내가 상상한 결혼 생활과 임신이란, 결혼 생활을 어느 정도 즐긴 뒤 임신을 계획하여 원하던 임신 소식을 기다렸을 때의 기쁨과 행복 그리고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축하를 받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가 한 임신은 나의 예상을 빗나갔다. 아이가 생겼다는 기쁨보다는 예상치 못한 임신 때문에 너무나도 힘들었다. 임신은 빠른 속도로 나의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먼저 육체적인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계약직으로 국가기관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임신 때문에 업무를 못 한다.’ 또는 ‘업무에 소홀하다.’는 소리를 듣기가 싫어서 맡은 모든 업무를 해냈고, 무거운 몸으로 비행기를 타고 출장을 다니는 것 또한 마다하지 않았다. 외국에 위치한 한국 기관인 데다가 임신한 직원은 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임산부에 대한 특별한 배려나 기준이 따로 없었고 출, 퇴근 조정이라든지 임산부 배려에 대한 것들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한번은 9시에 출근에서 업무가 11시에 끝나서 늦게 퇴근했는데 바로 다음 날인 아침 5시에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로 출장을 가기도 했다. 이런 업무의 피곤이 계속해서 쌓이기 시작했다. 또한 직장 상사에게 초음파 검사로 병원을 다녀온다고 말을 했고 허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있는데 나에게 전화를 해서는“지금 일을 안하고 뭐하냐.”고 면박을 받기도 했다. 결국 삼년 전 임신 중이던 당시에 계약 연장이 되지 않아서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고, 2017년 9월 가을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남편 없이 만삭의 몸으로 혼자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시차 적응이 안 되어 가뜩이나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마지막 한 달은 잠을 아예 잘 수가 없었다. 너무나 무거운 몸과 남편과 떨어져 출산을 준비하는 동안 우울증이 심하게 왔다. 남편이 학생인지라 경제적인 부분이 걱정되었던 마음에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혼자 아이가 있는 친구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아기 옷들을 물려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기 옷을 받으러 다닐 때, 지하철을 탔는데 그때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임산부를 위한 핑크석에 앉아있는 아저씨들과 아주머니들, 하물며 젊은 학생들은 임산부인 나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10번 중에서 1번 정도 양보를 받았다. 외국에서는 임신한 기간 동안에 어떤 교통수단을 탑승해도, 핑크석이 따로 없어도 남녀노소 불문하고 늘 양보를 받았었다. 혼자 한국에 온 것도 우울하고 힘들었는데 임산부를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화가 많이 나기도 했다.

출산 예정일에 가까이 왔을 때, 임신성 당뇨가 확정되었다. 그렇게 혼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산모와 아기가 위험한 상황이 되어 유도 분만을 시작했고 출산 진행이 되었다. 자연분만을 하고자 4일 동안 유도분만을 하였는데 마지막에 아기의 심장박동수가 줄어들게 되어 급하게 수술을 하였다. 분만실에 있는 동안 다른 아기들의 울음소리를 수십 번도 더 들었는데, 그렇게 나는 며칠에 걸쳐 출산을 진행했고 일주일 넘게 병원에 입원했었다. 남편은 출산 시에만 잠깐 한국에 왔다 갔고 나는 그 후로 퇴원을 하여 혼자 조리원에 들어갔다.

출산의 고통도 잠시 나는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아기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엄청난 스트레스와 산후우울증에 시달렸다. 남편은 외국에서 학생의 신분이었고 나는 일을 그만둔 상황이었다. 혼자서 모든 것이 바뀐 상황에서 당장 아기를 키워야 하는 현실에 처한 것이다. 1년 사이에 모든 것이 바뀐 것이다. 말 그대로 나는 경력단절녀가 된 것이다.

그때부터 남편이 너무나도 미웠다. 내가 느끼기에 남편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었다. 결혼 전처럼 그냥 유학생이고 외국에 사는데, 나는 직업도 사라지고 사는 곳도 바뀌고 혼자 덩그러니 아기와 함께 남겨진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 너무 우울했고 또 억울했다는 표현이 맞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가끔 나는 내가 살아 숨 쉬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친정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2018년 내가 산후우울증 때문에 힘들 때, 뉴스에서 아기 엄마인 장모씨가 딸인 장모양과 제주도에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난 정말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욕하지만 그들의 고통은 누구도 모를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서 아기를 안 키워봤기 때문에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많은 싱글 맘, 미혼 맘들이 얼마나 힘들게 목숨을 바쳐서 아기를 키우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나도 몇 번이나 그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출산 한 달 만에 나는 일을 시작했다. 2018년 1월부터 말이다.

나도 학창시절부터 대학원까지 장학금을 받아 공부를 열심히 했었고 모든 학업을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한순간에 그동안 열심히 쌓아온 나의 커리어가 단절되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당장 딸과 먹고 살 생활비를 버는 것 또한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했다. 간난 아기를 겨우 재우고 나서 밤을 새워서 이력서를 다시 쓰기 시작했고, 번역 작업을 닥치는 대로 시작했다. 사람이 잠을 제대로 못 자면 얼마나 정신과 체력이 나빠지는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지난 3년 동안 나는 정말 제대로 잔 기억도 없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2018년 5월에 결혼 1주년을 기념하여 틈틈이 모은 돈으로 폴란드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게 되었는데, 가장 최악의 형벌 중 하나는 창문이 없는 지하 수용소에서 잠을 못 자게 한다는 거였다. 그만큼 인간의 기본 욕구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얼마나 피폐한 삶을 살게 되는지를 알게 되었다. SNS에 올리는 사진이나 밖에서 사람을 만날 때는 멀쩡해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매일 밤 울었고 잠도 거의 못 잤으며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다. 무인도 같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혼자 살고 싶었다.

출산 후 강의와 통, 번역 일을 프리랜서로 해오다가 2018년 여름에 거의 반년 만에 재취업을 하게 되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30대 초중반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하게 된 것만으로도 설레고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작은 조직이다 보니 직장에서 아기 엄마는 또다시 나 혼자였고 그것만으로도 너무 힘들고 외로웠다. 육아에 대한 이해와 직장 다니는 엄마에 대한 배려가 많이 없었다. 코로나에도 재택근무 한번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직장이 지방에 위치하고 친정은 서울이다 보니 아기를 서울에 계신 친정엄마한테 맡겨야 했다. 아기가 아파도 주중에 지방에서 근무를 해야 했기에 아이를 챙겨 줄 수가 없었다. 해외 출장이 많아서 두 달에 한 번씩 링겔을 맞으면서 일했다. 20kg 짐을 지방에서 서울로 옮기고 서울에서 주말에 애를 보다가 외국으로 출장을 가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엄마와도 많이 싸우게 되었다. 엄마의 양육방식과 나의 양육방식도 많이 달랐고, 우리 모두 육아가 힘들다 보니 갈등이 많이 생겼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엄마가 늙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속상하고 너무나도 스트레스였다.

겨우겨우 하루를 버티며 살아가고 있던 나날이었는데 나를 너무나도 사랑해 주시고 나의 정신적인 지주이셨던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그 한 달이 나는 너무나도 힘들었다. 물론 종교가 있고 할머니와 천국에서 만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지만 다시는 못 볼 것이라는 생각에 너무나도 슬펐다. 내가 살면서 가장 사랑했던 분의 죽음을 삼일장 내내 지켜보면서 인생이 왜 이렇게도 허무하고 슬픈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일을 해야 했고, 그 와중에 아기를 돌보아야 하는 현실이 너무나도 서글프게 느껴졌다.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었고 해야 할 의지와 동기부여도 사라져만 갔다.

그렇게 아기를 낳고 의지할 남편도 없이 2년 동안 정말 앞뒤를 안 가리고 잠도 못 자면서 일을 하다 보니 몸과 마음이 너무나도 지쳐갔다. 일을 하다가 갑자기 열이 40도까지 올라가기도 했고 살면서 생전 안 나던 엉덩이 종기가 여러 개가 동시에 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주중에 오피스텔에 홀로 지내면서 ‘이렇게 외롭고 우울해서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외롭고 슬프고 우울했다. 나에게는 외국보다도 더 아는 사람이 없는 타지 생활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이러다간 정말 죽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육아휴직 3개월을 신청했다. 2019년 11월의 일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기를 낳고 1년 정도 육아휴직을 쓰는데 왜 나는 이제야 육아휴직을 쓸 수 있었을까 회의감이 들었다. 그래도 임신했을 때 계약직으로 일하다가 그만뒀을 때를 생각하면 정규직이 되어서 내가 원할 때 육아휴직을 쓸 수 있음에 감사드렸다. 그리고 이제는 원래의 내 모습을 찾고, 심신의 건강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육아휴직을 하고 매일 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운동과 성경 말씀 읽기이다.
몸이 너무 자주 아프고 지쳐서 운동과 충분한 수면을 통해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내가 원래 잘하고 좋아하던 것이 뭐지?.’라고 고민을 하던 끝에 ‘나는 원래 어릴 적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였구나.’를 깨달았다. 그래서 줌바 댄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산후우울증으로 계속해서 자살 충동과 우울증이 심각해져서 심리 상담을 가끔 받기도 했지만, 성경 말씀을 매일 꾸준히 읽음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동안 아기에게 잘해주지 못한 마음이 컸기 때문에, 온전히 아기를 돌보는 데 집중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임신과 출산 전에 원래 하고 싶었던 것들에 대해서 기록하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결혼하기 전에, 아기를 낳기 전에는 외국에서 일을 하다가 박사로 진학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이렇게 원래 내가 계획하고 꿈꾸던 것들을 다시금 적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나는‘나다움’을 찾기 시작했다.

짧지만 모든 것을 멈추고 약 100일이라는 삼 개월 동안 그동안 잃었던 나 자신과 그동안 못다한 것들을 조금씩 시작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감사한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주변 사람들의 많은 도움과 관심으로 이런 우울증을 조금씩 극복하게 되었다. 전 세계로 출장을 다니면서도 잠을 못 자고 아기 돌잔치를 준비했는데, 그 이유는 아기를 키우는데 정말 많은분들이 도움을 주셨기 때문이었다. 내가 남편 없이 한국에 와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모를 때 아기 선물을 보내주신 분들도 있고, 만삭이라고 정말 오랜만에 연락해서 맛있는 음식을 사주신 분들도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고마운 친구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해서 아기를 낳은 고등학교 친구였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 자율학습을 끝나고 함께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던 친구였다. 지금 그 친구는 학창시절 꿈을 이루었고 현재는 국내외를 오가면서 일을 하고 있는 나와 마찬가지로 직장 맘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우연히 일을 하다가 거의 10년 만에 다시 연락이 된 친구인데 우연히도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했고 나의 출산 예정일과 그 친구의 출산 예정일은 일주일 차이였다. 내가 아기를 낳고 혼자 병원에 있을 때 이 친구가 만삭의 몸으로 과일을 들고 찾아와서 출산을 축하해주었고 그 이후에도 힘들고 우울할 때마다 전화로 위로를 해주었으며 함께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해주었다. 육아휴직 1년 후 이 친구는 시차가 12시간이나 나는 외국으로 파견을 가게 되었는데, 본인도 바쁘고 힘들 텐데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나에게 전화를 해 주었고 안부를 물어봐 주었다. 정말 고마운 친구이다.

이 친구 외에도 정말 많은 좋은 분들이 지금의 나를 살게 해 주신 것 같다. 언제 어디에서나 함께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좋은 분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나도 임신을 하거나 주변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 위로해주고 들어주려고 노력한다. 힘든 시간을 버텨내었기 때문에 더 성숙한 인간이 되었고 다른 사람을 되돌아보게 되는 여유도 생긴 것이리라.

사실 나는 혼자 여행을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전 세계 60개국을 다녀올 정도로 나는 여행을 정말 사랑한다. 그래서 코로나가 심각해지기 전에 아주 오랜만에 인도네시아 발리로 홀로 여행을 다녀왔다. 아이가 생기고는 혼자 여행을 갈 염두도 안나고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이고, 다른 사람들이 내 인생을 살아 주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에 갑자기 홀로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혼자 여행을 다녀온 것만으로도 정말이지 힐링이 되었다. 인도양을 바라보며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바닷가 앞 카페에서 커피를 시켜놓고 커피 한잔에 집중하기도 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태양이 떴다가 지는 것을 살면서 처음으로 본 듯하다. 그러면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왜 이렇게 우울하고 힘들고 아플까.’ 하고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고 나 자신과 대화를 깊이 나누려고 노력했다. 그 시간이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진다. 오랜만에 행복했다.

올해 2월에 복직해서도 지금까지 꾸준히 운동과 성경 말씀 묵상을 실천하고 있다. 줌바 댄스는 코로나 때문에 못 하지만 그동안 배워보지 못한 골프를 도전하게 되었다. 성경 말씀은 이제는 신약성경을 다 끝내고 구약성경을 읽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임신과 출산, 육아로 못 만났던 고마운 사람들을 틈틈이 만나서 감사 인사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루하루 감사함을 느낄 때 사람은 행복을 느끼는 것 같다. 지금 일할 수 있음에, 지금 숨 쉴 수 있음에, 지금 예쁜 딸과 함께할 수 있음에, 지금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 하다 보면 하루하루가 너무나 소중해지고 슬프고 우울하고 누구를 미워할 시간조차 아까워진다.

그리고 내 인생의 목표였던 UN 공용어 6개 배우기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동안은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를 공부하였는데 이제 스페인어 공부부터 새롭게 시작하려고 한다. 틈틈이 공부해서 나중에 꼭 나만의 자서전을 쓰고 싶다. 그리고 그동안 계획했던 여러 자격증 취득과 새로운 경험을 해보려고 노력 중이다.
무엇보다도 힘들고 아플수록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다시금 느꼈다. 사실 당장 하루하루가 바쁘고 당장 먹고살기 힘든 형편이지만, 조금씩 모든 돈으로 딸이 돌이 되던 때에 고등학교 모교에 장학금을 조금 기부했다. 앞으로 꾸준히 계속해서 저축을 해서 나중에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중학교에 입학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마다 장학금을 조금씩 기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도 학창 시절에 경제적으로 어려워 학업을 그만둬야 할 상황이 많이 왔었고 그럴 때마다 매번 장학금을 받았었고 대학원까지 공부할 수 있었다. 그래서 꼭 직업이 생기면 꾸준히 다른 학생들을 도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아무리 상황이 슬프고 우울하고, 형편이 어려워 혼자 아기를 키우고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어도 장학금이든 다른 봉사 활동을 해서든 조금씩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야겠다고 다짐했고, 그러고 있다. 그럼으로써 다시금 감사하게 되었다.

우리 딸이 나중에 내 나이 또래가 되어 엄마가 되었을 때 우울하지 않고 즐겁게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며 일하고 육아하기 편한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힘들고 우울한 시간을 극복해서 먼 훗날 여유가 생기고 더 높은 지위가 되면 그런 사회를 위해서 일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 더 강한 여자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모든 걸 그만두고 싶은 나날이 정말 많았지만 그래도 극복하고 이겨내서 지금까지도 일하고 아이를 잘 키우고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나의 생활이 힘들면 힘들수록, 그동안 겪은 삶의 모습이 남들과 다르면 다를수록 나중에 성공하고, 사회에서 빛나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 스토리는 더 멋지고 아름다울 것이라고. 나는 이 세상에 많은 분들을 존경 하지만 육아를 하면서 계속해서 커리어를 이어가는 분들을 정말 존경한다. 돌이켜보면 내가 나다움을 잃고 결혼, 임신, 출산과 동시에 나 자신을 잃었던 점이 가장 나를 우울하게 했던 것 같다. 갑자기 1년도 안 되어서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가 되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남편 없이 아이를 출산해서 지금까지 가장으로서 일하면서 내 꿈을 잃지 않는 일이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Vita de prope tragoediam, sed de longe comoediam est.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지금 힘들어하고 있을 그녀들에게 전하고 싶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라고.
환경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고 지난 힘들었던 일들을 극복했던 것처럼 앞으로 나는 더 성장하고 발전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제부터가 진정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내 삶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남편도 아직도 학생이고 언제까지 내가 가장으로서 혼자 일을 하면서 딸을 키워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난 힘들었던 시간을 극복하면서 겪고 배운 것들을 공유해서 힘들어하고 있을 그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 우울증 극복 수기 공모전에 지원함으로서 힘들었던 지난날의 우울하고 힘겨워했던 나를 정리하고 다시금 나로서 살기를 원한다. 그리고 나의 인생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그 꿈과 목표를 다시 설정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번 응모전에 당선이 된다면 꼭 친정엄마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다.

우리 모두 고생했다고, 앞으로도 함께하자고, 잘하고 있다고 자축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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