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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잃고 12년간 시부 모신 엄마보며…비혼 딸 다큐로 찍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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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웰컴 투 X-월드'의 한태의 감독(왼쪽)과 어머니 최미경 씨가 15일 동교동 카페 1984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유리에 비친 사진기자의 실루엣이 한 감독 모녀가 한때 한집에 모셨고 여전히 가까이 왕래하는 할아버지까지 세 사람이 함께한 듯한 느낌을 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영화 '웰컴 투 X-월드'의 한태의 감독(왼쪽)과 어머니 최미경 씨가 15일 동교동 카페 1984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유리에 비친 사진기자의 실루엣이 한 감독 모녀가 한때 한집에 모셨고 여전히 가까이 왕래하는 할아버지까지 세 사람이 함께한 듯한 느낌을 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 며느리, 보기 드문 효부다. 남편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에도 부지런히 일하며 12년간 시아버지 모시고 아들‧딸과 한집에 살았다. 이미 오래 전 가족과 따로 지내온 시어머니까지 친정엄마처럼 챙기면서다. 그런 엄마의 희생을 보고 자란 딸은 “나를 위해 살겠다”며 비혼(非婚)을 결심했다. 급기야 할아버지가 ‘별거’를 통보하며 3년 전 모녀는 ‘강제 분가’를 했다.

29일 개봉 다큐 데뷔작 '웰컴 투 X-월드' #비혼 선언 한태의 감독과 엄마 최미경씨

29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웰컴 투 X-월드’는 딸 한태의(26) 감독이 엄마 최미경(54)씨의 ‘시집살이’ 독립기를 담아낸 작품이다. “엄마는 도대체 왜, ‘시월드’에서 탈출하지 않을까?” 이런 솔직한 질문에서 출발해 ‘엄마’ 꼬리표를 뗀 최미경이란 한 사람을 재기발랄한 시선으로 파고들었다.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 ‘새로운 시선상’에 더해 올해 EBS국제다큐영화제에선 아시아 대상을 차지했다.

나랑 너무 다른 우리 엄마 궁금했죠

15일 서울 동교동 카페에서 모녀를 만났다. 독립적인 밀레니얼 세대 딸과 전통적인 가족관의 엄마. 상극일 것이란 예상과 달리 의외로 친구 같이 허물없는 사이. 한 감독이 어릴 적부터 시시콜콜한 연애상담까지 뭐든 엄마와 공유해왔고 3살 터울 오빠가 2013년 호주로 건너간 뒤 더욱 도타워졌단다. 이번 다큐도 숭실대 영화과를 다니던 한 감독이 4년 전 중고 캠코더를 사고 “엄마와 놀듯이 찍기 시작한 게” 계기였다. “뭘 찍을까, 하다가 엄마를 탐구하고 싶었어요. 평소 엄마가 신기하고 궁금했거든요. 나랑 20년 넘게 살았는데 왜 이렇게 다를까.”

그는 “엄마를 보고 자라면서 은연중에 결혼하면 저렇게 다 감당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는데 그럼 결혼하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결혼이 무섭고 싫었던 것 같다”면서 “그런데 큰이모 인터뷰를 하고 이게 엄마 개인 문제가 아니란 걸 알았다”고 했다.

현모양처 시대 엄마, 딸은 비혼주의 

“시대가 가르친 거잖아요. 1960년대 여성들에게 현모양처랄지, 가정을 뒷받침하는 게 당연한 시대풍이었구나. 제 나이대 여자 친구들이 결혼을 기피하는 성향을 공유하는 것처럼요.”
최씨도 친정엄마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그는 “제가 5남매 중 넷째인데 남동생, 오빠 둘, 언니 하나였다. 언니랑 제가 엄마 하는 걸 보고 자랐다”면서 “제사가 참 많았다. 여름이면 일주일 간격으로 제사가 다섯 번 있었다. 정성스럽게, 깔끔하게 했다. 언니랑 저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시집가선 자동으로 엄마를 따라 한 것 같다. 엄마가 시킨 것도 아닌데”라고 돌이켰다.

다큐멘터리 '웰컴 투 X-월드'. 사진은 한 감독이 어린시절, 생전의 아빠, 엄마와 바닷가 나들이 간 장면이다. [사진 시네마달]

다큐멘터리 '웰컴 투 X-월드'. 사진은 한 감독이 어린시절, 생전의 아빠, 엄마와 바닷가 나들이 간 장면이다. [사진 시네마달]

또 “시댁이 아들만 셋이라 친정 아빠 엄마 일찍 돌아가신 저를 딸처럼 대해주셨다”면서 “태의 낳을 때까지 따로 살다가 시댁에 들어갔다. 그래도 남편이 장남이니까, 저는 구로동 식구들(시댁)을 정말 친정 식구처럼 생각했고 저희 나가면 아버님 혼자 계셔야 한다는 생각에 쉽게 이사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한씨 집안사람들이랑 멀어질까봐 걱정도 했다”라고 했다.

시월드도 엄마가 쌓아온 삶이란 것 알았죠 

한 감독은 시댁에 늘 진심인 엄마가 걱정이었단다. 노파심을 깬 건 엄마가 시댁 식구 대표로 친척 결혼식에 갔을 때였다. “엄마가 외로울까봐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선” 한 감독은 “고모할머니, 그러니까 할아버지 누나가 엄마를 보자마자 ‘아가’ ‘우리 강아지’라며 우는 광경을 봤다”고 했다. “친가 친척들이 다 손잡고 말 걸면서 엄마를 챙기는 게 신기했어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가 쌓아온 시댁 식구들과 유대관계가 엄마 삶에선 되게 큰 원동력이고 의지가 될 수 있겠다, 생각이 바뀌었죠.”

다큐멘터리 '웰컴 투 X-월드'에서 (왼쪽부터) 엄마 최미경씨는 분가하면 혼자 남을 시아버지 걱정에 딸 앞에서 눈물도 비친다. [사진 시네마달]

다큐멘터리 '웰컴 투 X-월드'에서 (왼쪽부터) 엄마 최미경씨는 분가하면 혼자 남을 시아버지 걱정에 딸 앞에서 눈물도 비친다. [사진 시네마달]

최씨는 23살에 남편과 불같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단 두 번째 만남에 청혼을 받고 수락했다. 풍족하지 못한 결혼생활에 후회도 했지만 아이들이 준 행복이 컸다. 남편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엔 어린 남매를 학교에 보내놓고 잠만 자며 고통을 삭이기도 했다. 초등학생이던 한 감독은 까마득히 몰랐단다. 엄마 ‘눈물 버튼’이던 아빠 사고 이야기도 이번 다큐를 통해 처음 진지하게 나눴다.

“아빠가 있었으면 태의가 정말 사랑 많이 받고 컸을 텐데. 제가 두 사람 몫을 하려고 최선을 다했죠.” 엄마의 고백에 한 감독이 가만히 덧붙였다. “저는 진짜 자유롭게 자란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엄마를 실망하게 할까 봐 무서워하는 게 신기했어요. 전 엄마랑 늘 ‘한 팀’ 같았거든요. 못하게 해야 반항심도 생기는데 엄마는 오히려 클럽 가라고 하고 오빠 연애할 때 커플티도 챙겨주고 가둬놓지 않았죠.” 엄마의 넉넉한 품에서 맘껏 자기답게 자란 딸은 어느새 엄마의 홀로서길 응원하는 든든한 동지가 됐다.

올추석 처음 차례 안 지내…세상 안 무너지더군요

한태의 감독의 옷매무새를 고쳐주며 안경 벗으라고 조언하는 최미경씨. ’(영화제, 관객과의 대화 등) 여행 다니는 게 신난다. 딸로 인해 이런 영광을 누린다“는 엄마의 딸 자랑에 한 감독은 쑥스러워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한태의 감독의 옷매무새를 고쳐주며 안경 벗으라고 조언하는 최미경씨. ’(영화제, 관객과의 대화 등) 여행 다니는 게 신난다. 딸로 인해 이런 영광을 누린다“는 엄마의 딸 자랑에 한 감독은 쑥스러워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결혼 전엔 디자이너를 꿈꿨던 최씨다. 귀에 피어싱을 뚫은 멋쟁이고 20년 베스트 드라이버이기도 했다. 모녀가 새로 집을 얻어 분가한 후에도 여전히 5분 거리에 사는 시아버지와 자주 왕래하며 챙기고 있지만, 최씨에겐 변화도 생겼다. 퇴근 후 집안일에 얽매였던 시간에 자전거를 배우고 소개팅을 했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서 더 나이 먹으면 동네에 조그마한 카페를 차리는 꿈을 꾸게 됐다. 21일 이 영화 언론시사회 후 기자간담회에서 한 감독은 올 추석 처음 차례를 지내지 않고 모녀가 오붓이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엄마도 너무 좋아하셨다. 너무 편하다고, 이래도 되는지 몰랐다고. 우리가 그렇게 차례를 꼭 지내지 않아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니까, 어머님들이 더 편하고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사시길 응원하고 싶다”면서다. “결혼이란 선택이 엄마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 면도 있음”을 깨달으면서 결혼에 대한 자신의 마음도 조금은 유연해졌다고 했다.

영화 제목 ‘웰컴 투 X-월드’는 원래 그가 ‘X’에 지나간 관계, 이사 가기 전 엄마의 과거 세계란 뜻을 담아 직접 지었던 제목이다. 영화를 미리 본 친구의 귀띔이 그 의미를 한층 풍성하게 만들었다. “친구가 X에 미지수의 뜻도 있다고, 엄마의 알 수 없는, 하지만 알아가고 있는 세계를 담은 영화 같다는 감상평을 전해줬어요. 그 이야기가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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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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