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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남편 시중기’ 쓴 박래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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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1962년 그는 잡지사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고 한참 동안 망설였다고 합니다. 잡지사에서 요청한 글은 ‘남편 시중기’. 청각장애인 화가 남편의 예술 작업을 어떻게 돕고 4남매를 키우며 집안일을 하는지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는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그해 11월호 『여원』에 ‘남편 시중기’를 씁니다. “나는 현처는커녕 현처 근방에서 서성댈 자격조차 없는 것이다”라고 시작하는 글을.

‘운보 김기창의 아내’로 유명했던 박래현(1920~1976) 작가 얘기입니다. 네, 그가 바로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박래현, 삼중통역자’ 전시의 주인공이죠. ‘남편 시중기’란 표현만 보아도 그 시대가 도쿄 유학생 출신 화가인 그에게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주부’의 이미지를 얼마나 씌우고 싶어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그는 1969년~74년 미국 유학을 감행했는데요, 74년 유학에서 돌아오자 그에게 한국사회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신사임당상을 안겨줍니다. 이 정도면 ‘꼼짝마! 당신은 뭘 해도 현모양처야’ 수준의 대접입니다.

‘작품’, 1970~73, 에칭, 에쿼틴트, 58.8x36㎝, 개인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작품’, 1970~73, 에칭, 에쿼틴트, 58.8x36㎝, 개인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번 전시를 보면, 그 시대 한가운데서 죽는 날까지 자신의 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은 작가 박래현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남편 시중기’를 썼던 박래현은 한국 여성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우리 여성들의 생활이 너무나 종속적이었다는 것은 두말을 필요치 않을 것이다”라 썼고, “이 분주한 가정 속에서 여성들이 (···) 자기가 희망하고 있는 자기의 생활을 그대로 계속해 나갈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하고 물었습니다.

박래현은 1950~60년대 한국사회가 ‘여성’과 ‘여류화가’에게 요구하는 역할에 ‘화합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현실에 절대 안주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만나는 많은 작품이 예술가로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의 삶을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일본화를 배웠지만, 해방 후 자신만의 고유한 색감과 기술로 독자적인 추상화를 그렸고, 나이 쉰 즈음엔  미국에서 공부하며 판화라는 낯선 매체에 도전했습니다. “평소 화선지의 한계에서 벗어나 보려던 나에겐 깊고 절실하게 구체적으로 손에 잡혀 표현되는 여러 가지의 판화 기술이 매혹적이었다.” 이 짧은 문장에 새로운 재료와 기법을 만난 예술가 박래현이 설렘이 그대로 보입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예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가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어떻게 김기창 작품 없이 박래현 전시를 하느냐”는 것이었다죠. ‘남편 시중기’의 시대는 지났지만, 시대는 느리게 진보합니다. 100년 전 태어난 박래현의 예술도, 2020년 그의 전시도 당연하게 주어진 것은 없습니다. 이번 전시가 특히 고마운 이유입니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