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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23년차’ 라이언 킹의 라스트 댄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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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등번호 20번을 내보이는 이동국. 그는 다음달 1일 은퇴 경기를 한다. [사진 전북 현대]

등번호 20번을 내보이는 이동국. 그는 다음달 1일 은퇴 경기를 한다. [사진 전북 현대]

프로축구 전북 현대 베테랑 공격수 이동국(41)은 지난해 말 JTBC 예능 ‘아는 형님’에 나와 “내가 동료들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올해가 형의 마지막 시즌이야’다. 그렇게 말한 지 5년 됐다. 이젠 아무도 안 믿는다”며 웃었다.

이동국, 소셜미디어로 은퇴 발표 #역대 최다골·우승 7회·MVP 4회 #K리그 최고 별, 지도자로 새출발

지난주 이동국이 은퇴를 결심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동료들은 믿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진짜였다. 이동국은 26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올 시즌을 끝으로 인생 모든 것을 쏟았던 그라운드를 떠난다”며 은퇴 선언을 했다. 프로 23년차 그의 마지막 경기는 다음달 1일 전주에서 열리는 대구FC와 K리그1 최종전이다.

최근 수 년간 이동국은 연말이 되면 “은퇴 계획은?”이란 질문을 받았다. 그는 매번 “감독이 원하고, 또 나 스스로 경기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느낄 때까지만 뛸 것”이라고 답해왔다. 일본 J리그 최고령 출전기록 보유자인 미우라 가즈요시(53·요코하마FC)와 종종 비교되지만, 지향점은 달랐다. 스폰서십을 몰고 다니는 미우라는 ‘현역’이라는 타이틀 자체에 상징성을 부여한 케이스다. 전북 유니폼 판매량 1위 이동국은 “경기력이 아닌 다른 이유로는 뛰고 싶지 않다”고 강조해왔다.

K리그 최다골과 7차례 우승 네번의 MVP 수상자 이동국. [사진 전북 현대]

K리그 최다골과 7차례 우승 네번의 MVP 수상자 이동국. [사진 전북 현대]

K리그 최다골(228골)과 7차례 우승, 그리고 네 번의 MVP 수상. 이동국이 K리그 역사에 세운 굵직한 이정표다. 올 시즌에도 4골을 넣으며 건재를 과시했지만, 7월 무릎 내측인대를 다친 게 변수가 됐다. 지난달 복귀했지만, 후반 교체 선수 역할에 머물렀다. 이동국 측근은 “몸도 안 좋은데, 그만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전했다.

1979년생. 우리 나이로 42세다. 동기 모임인 ‘79클럽’의 박동혁은 아산 감독, 김은중은 올림픽팀 코치다. 최강희 전 전북 감독은 “40대인데도 풀타임을 뛴 다음 날 피부가 뽀송뽀송하다”며 감탄했다. 젊은 선수 못지 않은 회복 능력을 타고났지만, 오래 뛸 수 있었던 비결은 8할 이상이 철저한 자기 관리에 있었다.

이동국과 오남매. 가족은 지금껏 그를 뛰게 만든 원동력이다. [사진 이동국 인스타그램]

이동국과 오남매. 가족은 지금껏 그를 뛰게 만든 원동력이다. [사진 이동국 인스타그램]

이동국은 ‘10만분의 1’ 확률이라는 겹쌍둥이를 포함해 5남매를 뒀다. 가족은 지금껏 그를 뛰게 만든 원동력이다. 이동국은 “아빠는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박수 받는 사람이란 걸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수퍼맨이 돼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다”고 말해왔다.

굴곡도 많았다. 1998년 월드컵에서 혜성처럼 등장해 ‘라이언 킹’이라 불렸지만,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게으른 천재’로 낙인 찍혀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2006년 월드컵 직전엔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져 주저앉았다. 아내 이수진씨는 남편이 시련에 부딪히면 “우리 영화를 찍고 있다고 생각하자. 엔딩이 중요하니 마지막에 꼭 웃자”고 위로했다.

선수 이력을 해피엔딩으로 마친 이동국은 지도자로 새출발한다. 일찌감치 ‘축구 인생 2막’을 꼼꼼히 준비해왔다. 6월에 아시아축구연맹(AFC) A급 지도자 1차 교육을 이수했고, 다음달부터 2차 강습을 받는다. 언젠가 김상식 전북 코치가 감독으로 승격하고, 이동국이 코치를 맡아 선수단을 이끄는 그림이 현실이 될 수 있다. 최근에 모 방송사로부터 축구 해설위원 제의도 받아놓은 상태다.

이동국은 은퇴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밝혔다. 프리랜서 장정필

이동국은 은퇴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밝혔다. 프리랜서 장정필

두 달 전 ‘먼훗날 지도자 이동국의 모습은 어떨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이동국은 “선수들과 소통하며 능력과 잠재력을 끌어 올려주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 선수 생활을 길게 하고, 인생의 굴곡도 적지 않으니 (후배들에게) 해 줄 얘기가 많을 것 같다”고 했다.

이동국에게 월드컵은 결국 선수로써  풀지 못한 숙제다. 지도자로는 성공해서 축구대표팀 지휘봉을 잡고 월드컵 무대에 나선다면, 더 멋진 두 번째 엔딩도 가능하지 않을까.

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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