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건강한 가족] 약발 안 듣는 난치성 뇌전증, 전기 치료로 발작 증상 확 줄인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3면

삼성서울병원 손영민 교수가 전기 자극으로 난치성 뇌전증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치료하는 뇌 심부 자극술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김동하 객원기자

삼성서울병원 손영민 교수가 전기 자극으로 난치성 뇌전증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치료하는 뇌 심부 자극술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김동하 객원기자

 러시아 혁명가 레닌과 전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모두 말년에 뇌전증(과거 간질로 불림)을 앓았다. 레닌은 50대부터 마비·실어증 등을 보이다 그치지 않는 발작으로 인해 결국 숨을 거뒀다. 루스벨트는 4선에 성공한 직후 뇌전증이 심해져 지인조차 몰라볼 정도였다.

진화하는 뇌 심부 자극술

 오늘날에도 뇌전증은 ‘예측 불가의 병’으로 통한다. 유전·외상, 뇌 질환 등 원인이 다양해 예방이 어렵다. 언제, 어디에서 증상이 나타날지 정확히 알 수도 없다.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손영민(52) 교수는 “평생에 걸쳐 불과 2시간도 채 되지 않는 뇌전증 증상 때문에 환자는 수십 년을 우울·불안 속에서 살아간다”며 “치매·뇌졸중 다음으로 흔한 뇌 신경 질환이지만, 병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 증상을 숨기거나 제때 발견하지 못해 병을 키우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가볍고 오래가는 전기 자극 발생기

뇌의 신경세포는 서로 전기신호를 주고받으며 정보를 교환한다. 이런 전기신호가 비정상적으로 증폭하면 뇌에 과부하가 걸려 언어·행동·감각 기능이 일시적으로 마비되는데,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질환을 뇌전증이라 한다. 전기 충격을 받은 듯 거품을 물거나,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모습은 뇌전증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뇌전증에 ‘난치병’이란 꼬리표가 따라붙는 이유다.

 하지만 뇌전증은 예측이 어려울 뿐 충분히 관리 가능한 질환이다. 실제로 뇌전증 환자의 약 70%는 항경련제 등 약물만으로 발작이 통제된다. 고혈압·당뇨병처럼 약만 잘 먹으면 별다른 증상 없이 운전·업무·학업 등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약으로는 치료가 잘 안 되는 30%의 ‘난치성 뇌전증’도 수술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존재한다. ‘뇌 심부 자극술’이 대표적이다. 대뇌에 가는 백금선(전극)을 삽입한 뒤 약한 전기 자극을 가해 흥분된 뇌를 가라앉히는 치료법이다.

 황성희(가명)씨는 40대 중반에 갑작스럽게 뇌전증이 발병했다. 약을 먹어도 발작이 조절되지 않아 생업마저 포기해야 했다. 그러던 중 손 교수를 만나 2007년 뇌 심부 자극술을 받았고, 10년 넘게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1년에 한두 번, 그것도 떨림 등 경미한 증상만 나타날 뿐이다. 지금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손 교수는 “그동안 뇌 심부 자극술을 받은 뇌전증 환자 29명을 최대 11년간 장기 추적한 연구(유럽 뇌전증학회지, 2017)에서 환자의 발작 빈도는 평균 70%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수많은 환자가 뇌 심부 자극술을 통해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고 전했다.

 뇌 심부 자극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백금선의 직경은 1㎜ 정도로 다른 뇌 부위 손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가슴 부위에 이식하는 전기 자극 발생기는 무선 충전이 가능해 15년 이상 장기 사용할 수 있다. 무게도 달걀만큼 가벼워 일상생활을 하는 데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다.

 수술 방식도 보다 정교해지고 있다. 종전에는 부작용이 심한 ‘시상하부’ ‘소뇌’ 등에 백금선을 꼽았지만, 뇌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지금은 ‘전시상핵’ ‘해마’처럼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전기신호를 컨트롤할 수 있는 부위를 치료 대상으로 삼는다.

자주 넋 놓거나 입 쩝쩝거리면 의심

최근 손 교수는 전시상핵을 세분해, 특히 전방 부위에 백금선을 삽입할 경우 발작 감소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점을 보고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뇌전증은 뇌 심부 자극술을 포함해 약물, 뇌 절제술 등 다양한 치료법으로 ‘맞춤 관리’가 가능한 한 거의 유일한 뇌 신경 질환”이라며 “병에 대한 두려움에 치료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관건은 뇌전증의 신호를 알아채는 일이다. 대개 뇌전증이라면 경련과 함께 쓰러지거나 입에 거품을 무는 대발작만을 생각한다. 그런데 성인의 경우 대발작보다는 멍하니 한 곳을 바라보거나 동일한 행동을 1~2분 반복하는 소발작(자동증)이 훨씬 많다는 게 손 교수의 설명이다. 이런 소발작 증상은 다른 뇌 질환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뇌전증만의 고유한 증상이다.

 뇌전증을 제때 관리하지 않으면 불의의 사고나 무산소성 뇌 손상으로 치명적인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 손 교수는 “뇌전증의 환자 분포는 소아·고령에 집중되는 ‘U자 곡선’을 그린다”며 “60대 이후로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쩝쩝 다시거나 주변 물건을 만지작거리는 등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면 병원을 찾아 뇌전증 검사를 받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박정렬 기자 park.jungryul@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