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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피가로서 천자문까지…문자에 맺힌 물방울 45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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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200여 개 문자와 단 하나의 물방울을 대치시킨 1991년 작, 캔버스에 먹과 유채, 197x333.3㎝. [사진 갤러리현대]

200여 개 문자와 단 하나의 물방울을 대치시킨 1991년 작, 캔버스에 먹과 유채, 197x333.3㎝. [사진 갤러리현대]

서울 삼청로 갤러리현대 전시장. 지하 1층부터 2층까지 작품 30여 점이 그득 걸렸지만 작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올해 그의 신작은 한 점도 나오지 않았다. 최근 그의 가족은 작업실이 자리한 서울 평창동 자택을 종로구립 미술관으로 조성하는데 합의했다. 미술계 인사들은 이번 전시를 두고 “혹 작가의 생전 마지막 전시가 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한다.

김창열 개인전 ‘더 패스(The Path)’ #91세 화가 대표작 30여 점 재조명 #“물방울로 세계의 무상성 보여줘”

‘물방울 화가’ 김창열(91)화백 얘기다. 그의 개인전 ‘더 패스(The Path)’가 23일 개막했다. 갤러리현대는 1976년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던 김창열의 개인전을 처음 개최한 이래 지금까지 13차례 전시를 열었다. 갤러리현대는 “김창열의 작품 세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하기 위해 열네번 째 전시를 마련했다”고 했다.

1991년 작, 캔버스와 한지, 먹과 아크릴, 130.3x162.2㎝. [사진 갤러리현대]

1991년 작, 캔버스와 한지, 먹과 아크릴, 130.3x162.2㎝. [사진 갤러리현대]

이번 전시는 ‘문자와 물방울의 만남’에 방점을 찍었다. 이를테면 1층 전시장에서 소개한 1975년 작 ‘르 피가로’는 김창열의 물방울이 문자와 처음 만난 기념비 같은 작품이다. 작가는 세 명의 무장 강도가 은행을 털었다는 기사와 처칠의 전시회 풍자만화가 실린 프랑스 신문 1면 위에 수채 물감으로 투명한 물방울을 그려 넣었다. 한자의 획을 연상시키는 추상적 이미지와 물방울이 만난 1987년 작 ‘회귀(Recurrence)’ 연작도 눈길을 끈다. 캔버스에 스며든 듯한 획의 이미지와 물방울들이 팽팽하게 대치한다.

빛을 머금은 물방울 그림에 한자를 끌어들인 김창열 화백. 화폭에 우주와 인간, 자연과 문명을 드러내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사진 갤러리현대]

빛을 머금은 물방울 그림에 한자를 끌어들인 김창열 화백. 화폭에 우주와 인간, 자연과 문명을 드러내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사진 갤러리현대]

김 화백은 1929년 12월 24일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나 16세에 월남했다. 이쾌대(1913~1965)가 운영하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웠고, 검정고시로 1948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으나 6·25 발발로 학업을 중단했다. 1957년 한국의 앵포르멜(작가의 즉흥적 행위와 격정적 표현을 중시한 추상미술) 미술운동을 이끌던 그는 미국에서 4년간 판화 공부를 하고 1969년 파리에 정착했다.

물방울의 발견은 우연이었다. 1972년 파리에서 작업할 때다. “밤새 그린 그림이 마음에 안 들어 유화 색채를 떼어내고 캔버스를 재활용하려 물을 뿌려놨는데 물이 방울져 아침 햇살에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존재의 충일감에 온몸을 떨며 물방울을 만났다.” 그의 회고다. 이후 1972년 파리에서 열린 전시 ‘살롱 드 메’에서 물방울 회화를 처음 선보였고, 2009년 한국으로 온 이후 지난해까지 물방울 그림에 반평생을 바쳤다.

1987, 캔버스에 유채, 195x330㎝. 위부터 3점 모두 ‘회귀’ 연작. [사진 갤러리현대]

1987, 캔버스에 유채, 195x330㎝. 위부터 3점 모두 ‘회귀’ 연작. [사진 갤러리현대]

1980년대 후반의 ‘회귀’연작부터 캔버스에 천자문을 쓰거나 그리고 문자 주변에 물방울을 정교하게 배치해 그리기 시작했다. 일찍이 평론가들은 물방울과 천자문의 만남이 그의 작품 세계를 확장한 기폭제라고 보았다. 천자문 자체가 동양의 철학과 정신을 담고 있어서다. 오광수 미술평론가는 “글자라는 기억의 장치가 물방울이라는 곧 사라져버릴 형상과의 미묘한 만남”이라 했고, 작고한 이일 평론가는 “문자와 이미지의 대비를 넘어 동양적 원천에로의 회귀”라고 평했다.

이번 전시엔 초록 바탕에 천자문의 첫 두 구절인 ‘천지현황 우주홍황(天地玄黃 宇宙洪荒)’이라 쓴 ‘회귀’ 연작도 눈에 띈다. 그는 천자문을 쓰면서 한지와 먹 등 동양화 재료를 적극적으로 썼다. 농담을 다르게 쓴 글자를 겹겹이 교차시키며 쌓은 문자로 화면을 뒤덮기도 했고,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록처럼 물감을 뿌리고 그 위에 라텍스로 만든 한자를 붙였다 떼어내며 입체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단정한 글씨가 한쪽에 빼곡하게 자리한 대형 화면에 단 한 방울의 물방울이 마주한 1991년 작 ‘회귀’는 독특한 균형감 면에서 압권이라 할 만하다.

‘르 피가로(Le Figaro)’, 1975, 신문에 수채, 53.5x42㎝. [사진 갤러리현대]

‘르 피가로(Le Figaro)’, 1975, 신문에 수채, 53.5x42㎝. [사진 갤러리현대]

맑고 투명한 물방울의 의미는 무엇일까. 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 학장은 “동아시아 철학과 예술에서는 변화하는 세계의 무상성을 나타내기 위해 일찍이 바람, 구름, 물(이슬) 등에 주목했다”며 “김창열은 무상성을 상징하는 유수(流水)를 물방울로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미술평론가 주니치 쇼다는 “김창열의 회화를 단순한 리얼리즘 회화로 파악해선 안 된다”며 “스쳐가는 시간 속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물방울의 온갖 모습이 여기 담겨 있다. 요컨대 그것은 시간의 회화”라고 했다. 이어 “물방울 회화에서 화가의 의도는 다름 아닌 화면의 구성에 담겨 있다”면서 “얄궂을 정도로 정묘한 구성, 시적인 공간의 아름다움과 질서가 화면을 지배한다. 여기에는 동양의 전통적인 공간 감각이 살아 있다”고 했다.

1988년 도쿄 전시 당시 작가는 “물방울을 그리는 것은 모든 사물을 투명하고 텅 빈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용해하는 행동이다. 나는 나의 자아를 무화시키기 위해 이런 방법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빛을 머금은 물방울, 그 순간의 아름다움에 평생 홀려 지낸 작가…, 김창열이다. 전시는 11월 2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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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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