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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별세] 말수 적었던 소년, 레슬링·싸움은 끝장 봐야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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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건희 1942~2020 

1953년 일본 여행 중 부친 이병철 회장, 모친 박두을 여사와 함께한 이건희 회장(왼쪽부터). [중앙포토]

1953년 일본 여행 중 부친 이병철 회장, 모친 박두을 여사와 함께한 이건희 회장(왼쪽부터). [중앙포토]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은 1993년 삼성의 ‘2류 근성 척결’을 외친 신경영 선언 다음 달 사장단을 일본 오사카로 불렀다. “한 손을 묶고 24시간 살아봐라.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극복해 보라. 나는 해봤다. 이것이 습관이 되고 쾌감을 느끼며 승리감을 얻게 되면 그때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삼성 사장단은 이 말을 듣고 삼성의 고질병을 고치기 위한 이 회장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집념과 뚝심의 인생 드라마 #일본 유학 때 역도산 찾아가기도 #평소 “어떤 승리도 우연은 없다” #이병철, 장·차남 대신 후계자 낙점 #평창 유치 기여한 ‘스포츠 외교관’

이 회장은 42년 대구에서 출생했다. 당시 삼성상회 경영에 바빴던 호암 이병철 선대 회장은 고향인 경남 의령으로 이 회장을 보내 할머니 밑에서 자라게 했다. 이 회장이 여섯 살이 돼서야 온 가족이 서울 혜화동에 모여 살게 됐다. 이 회장은 부산사범초등학교를 다니던 5학년 때 부친의 권유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학창 시절 눈에 띄지 않는 내성적인 학생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말을 하기 시작하면 쉽게 반박하기 어려운 지식과 논리를 쏟아내 또래를 당황스럽게 했다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고교 때 전국레슬링대회 웰터급 입상

이 회장은 일본 유학 시절 거친 레슬링에 빠져들었다. 일본에서 한국계 프로레슬러인 역도산을 직접 찾아갈 만큼 열렬한 팬으로 알려져 있다. 이 회장이 레슬링 선수로 활약한 경험은 경영철학에도 스며들었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스포츠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교훈은 어떤 승리에도 결코 우연이 없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서울사대부고 시절인 59년 전국레슬링대회에 웰터급으로 출전해 입상하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이 60세 생일을 맞은 2002년 1월 부인 홍라희 여사, 손자 이지호군과 찍은 사진. [중앙포토]

이건희 회장이 60세 생일을 맞은 2002년 1월 부인 홍라희 여사, 손자 이지호군과 찍은 사진.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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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과 동기인 서울사대부고 13회 졸업생들이 기억하는 일화가 있다. 이 회장이 고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싸움을 제일 잘한다는, 요즘으로 치면 ‘일진’과 맞붙은 사건이다.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 뒤에서 벌인 싸움은 무승부로 끝났다. 이 싸움의 심판을 봤다는 홍사덕(지난 6월 별세) 전 의원은 생전 중앙일보에 이 일화를 털어놓으며 “이 회장이 말수는 적었지만 승부를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는 ‘싸움닭’ 기질을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77년 8월 한국 재계는 호암의 후계 구상 공개로 술렁였다. 이병철 선대 회장은 일본 닛케이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이건희 당시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를 후계자로 점찍었다. 이 선대 회장은 당시 “삼성이 작은 규모의 기업이라면 위에서부터 순서를 따져 장남이 맡으면 되겠지만 삼성그룹 정도의 규모가 되면 역시 경영능력이 없으면 안 된다”며 “장남(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은 성격상 기업 경영이 맞지 않기 때문에 기업에서 손을 떼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차남(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은 중소기업 정도의 사고방식밖에 없기 때문에 삼성그룹을 맡길 수 없다. 그래서 아들 셋 가운데 막내(이건희 회장)를 후계자로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평창 위해 1년여간 170일 해외출장 소화

이병철 회장의 62세 생일을 맞은 1972년 장충동 자택에서 찍은 가족 사진. 왼쪽 둘째부터 시계방향으로 5녀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 이건희 회장, 장녀인 이인희 한솔 고문, 당시 다섯 살이던 이재용 부회장. [중앙포토]

이병철 회장의 62세 생일을 맞은 1972년 장충동 자택에서 찍은 가족 사진. 왼쪽 둘째부터 시계방향으로 5녀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 이건희 회장, 장녀인 이인희 한솔 고문, 당시 다섯 살이던 이재용 부회장. [중앙포토]

이 회장은 ‘스포츠 외교관’ 역할도 했다. 96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선임됐고, 97년엔 삼성전자가 IOC의 올림픽 마케팅 파트너가 됐다. 특히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IOC 위원인 이 회장은 직접 관계자들을 만나며 유치 활동을 펼쳤다.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부터 2011년 남아공 더반 IOC 총회까지의 기간에 170일 해외출장 일정을 소화하기도 했다. 평창은 세 차례 도전 끝에 2018년 올림픽을 유치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주요 연보.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주요 연보.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이 회장은 오디오·자동차·애견 등 혼자 할 수 있는 취미를 즐겼다. 영화감상도 이 회장의 취미 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영화를 여러 각도에서 보면 작은 세계를 만나게 된다. 그것이 습관으로 굳어지면 입체적으로 생각하는 ‘사고의 틀’이 만들어진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건희식 경영’의 그림자도 있었다. 자동차 사업의 실패가 대표적이다. 이 회장은 95년 숙원이었던 자동차에 진출했지만 외환위기 등을 겪으며 좌초했다. 결국 4조3000억원의 막대한 부채를 안은 채 99년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한국의 오랜 정경유착 관행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등 불법 정치자금 사건에 여러 번 연루됐다. 삼성이 창업 초기부터 고수한 무노조·비노조 경영 원칙도 시민·노동계의 끊임없는 반발을 샀다.

김태윤·장주영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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