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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투 치다 발견한 힙합 본능···미국 홀린 순창 '할미넴' [영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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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회 국제 에미상' 다큐 부문 결선에 오른 KBS 전주방송총국 휴먼뮤직다큐 '할미넴'의 한 장면. 사진 왼족부터 박향자(62), 백성자(75), 김영자(75), 오순례(69), 강성균(28)씨. [사진 KBS 전주방송총국]

'제48회 국제 에미상' 다큐 부문 결선에 오른 KBS 전주방송총국 휴먼뮤직다큐 '할미넴'의 한 장면. 사진 왼족부터 박향자(62), 백성자(75), 김영자(75), 오순례(69), 강성균(28)씨. [사진 KBS 전주방송총국]

70년 만에 자기 이야기 목청껏 외친 할머니 래퍼들

평균 나이 70세인 시골 할머니 4명이 고향에 돌아온 20대 청년에게 랩을 배운다. 한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온 할머니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가사로 만들어 목청껏 외쳤다.

지역 방송국 맹남주·허유리 PD 작품 #'방송계 아카데미상' 다큐 결선 진출 #다음 달 23일 미국 뉴욕서 시상식 #허 "고령화·청년실업 해결책 가까이 있어" #맹 "꿈꾸는 데 나이·공간 제약될 수 없어" #송가영 작가 "힙합 아래 서로 위안 찾아"

 KBS 전주방송총국 맹남주(47) PD와 허유리(32) PD가 연출하고, 송가영(42) 작가가 구성한 휴먼뮤직다큐 '할미넴'의 줄거리다. '할미넴'이 미국 텔레비전 과학기술 아카데미가 주최하는 '제48회 국제 에미상' 다큐멘터리 부문 결선에 올랐다. 후보작 4개 중 아시아 작품은 '할미넴'이 유일하다. 올해 에미상 결선에 오른 유일한 한국 작품이기도 하다.

 '방송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에미상 진출작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할미넴'을 제작한 맹 PD와 허 PD, 송 작가를 지난 22일 만났다.

'할미넴' 제작진이 지난 22일 KBS 전주방송총국 앞에 나란히 섰다. 사진 왼쪽부터 허유리 PD, 송가영 작가, 맹남주 PD. 김준희 기자

'할미넴' 제작진이 지난 22일 KBS 전주방송총국 앞에 나란히 섰다. 사진 왼쪽부터 허유리 PD, 송가영 작가, 맹남주 PD. 김준희 기자

 '할미넴'은 맹 PD 등 스태프 5명이 지난해 7월부터 11월 초까지 넉 달여간 전북 순창에서 할머니들과 동고동락하며 만든 작품이다. 예산 2000여만원을 들여 이승식(42) 촬영감독이 카메라 한 대로 찍었다.

 지난해 11월 방영 당시 젊은이만의 음악으로 알려진 랩을 할머니들이 배우는 이야기를 담아 화제가 됐다. '얌전공주' 백성자(75), '꽃샘' 김영자(75), '부자입술' 오순례(69), '빅맘' 박향자(62) 할머니가 주인공이다. 4년간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힙합 음악을 만들던 강성균(28)씨가 순창국악원 '균이균이 힙합교실'에서 할머니들을 가르쳤다.

 허 PD는 "순창군에서 국악원 행정 업무와 어르신들을 위한 랩 교실을 맡기기 위해 래퍼를 계약직으로 뽑았다는 얘기를 듣고 작품을 기획하게 됐다"며 "성균씨가 수박을 들고 직접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할머니들을 캐스팅했다"고 말했다. 강씨가 만든 팀 이름은 '할미넴'. 미국의 유명 래퍼 에미넴과 할머니를 합친 말이다.

헤드셋을 쓴 할머니 래퍼 김영자(75)씨. [사진 KBS 전주방송총국]

헤드셋을 머리에 쓴 백성자(75)씨가 칼질을 하며 랩 연습을 하고 있다. [사진 KBS 전주방송총국]
헤드셋을 머리에 쓴 백성자(75)씨가 활짝 웃고 있다. [사진 KBS 전주방송총국]

 강씨는 할머니들이 화투를 치며 나누는 대화를 듣고 "기본적으로 재능이 있다. 뭔 말을 해도 비트만 틀어 놓으면 랩 같다"고 했다. 그는 민요와 트로트가 익숙한 할머니 제자들에게 "힙합은 뭘로 정의할 수 없지만 자유가 중요하다. 같이 노래하고 생활하는 게 크루(팀)"라고 강조했다.

 맹 PD는 "힙합 정신은 저항이고 솔직함이다. 이런 면에서 성균씨가 음악에 대해 바른 자세를 갖고 있었고, 그의 힙합 정신에 할머니들이 공감해 본인 삶을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기존 다큐에선 음악이 배경 음악으로 소비됐다면 '할미넴'에선 랩이 가진 가사가 서사의 한 축을 담당한다"며 "작품을 설계할 때 크루·스웩 등 힙합에 필요한 구성 요소를 각 신(장면)으로 구분해 시청자들이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다"고 했다. 강씨가 할머니들을 처음 만나는 장면에 '레슨 #1 CREW(크루): 우리'라는 제목을 붙이는 식이다.

 할머니들이 빠른 속도로 가사를 내뱉는 건 버거웠다. 가사를 직접 쓰고, 이것을 외워서 박자에 맞춰 읊조리는 건 더 어려웠다. 이 때문에 할머니들은 강씨가 준 헤드셋을 머리에 쓰고 고추밭에 갈 때나 설거지를 할 때도 랩 연습에 몰두했다.

'할미넴'의 연습 장면. '호랑이 남편'의 반대로 한 달간 잠적했던 박향자씨(맨 왼쪽)가 파자마 차림으로 돌아온 날이다. [사진 KBS 전주방송총국]

'할미넴'의 연습 장면. '호랑이 남편'의 반대로 한 달간 잠적했던 박향자씨(맨 왼쪽)가 파자마 차림으로 돌아온 날이다. [사진 KBS 전주방송총국]

 할머니들이 저마다 자기 삶이 담긴 가사를 적어 오면 강씨가 다듬어 곡을 만들었다. '어릴 적 산골짜기 전기가 없는 초가집'(박향자) '남은 다섯 식구 엄만 너희의 지붕'(백성자) 등의 가사가 담긴 2분 40초짜리 힙합 곡 '할미넴'이 탄생한 과정이다.

 고비도 있었다. 랩을 제일 잘하던 박향자 할머니가 갑자기 연락을 끊고 한 달간 수업에 빠졌다. '호랑이 남편'이 "여자가 무슨 랩이냐"고 반대해서다. 허 PD는 "하지만 박 할머니가 성균씨가 보내준 '할미넴' 가사를 본 뒤 '내가 쓴 기사는 내가 해야겠다'며 대회 직전 파자마 차림으로 돌아왔다. 가사도 다 외워 왔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할머니들이 랩을 한다는 소식에 가장 놀란 건 가족이었다. "우리도 못하는 랩을 한단 말이에요?" "할머니가 랩을 하니 신기해요" "우리 어머니가 가슴에 이런 걸 많이 품고 있고, 우리한테는 얘기도 안 하시면서 혼자서 삭이시는구나 생각하니 죄송스럽습니다" 등. 백성자 할머니가 쓴 랩 가사를 들은 자녀와 손자가 보인 반응이다.

할머니 래퍼들의 젊은 시절. 왼쪽부터 김영자·백성자·박향자씨. [사진 KBS 전주방송총국]

할머니 래퍼들의 젊은 시절. 왼쪽부터 김영자·백성자·박향자씨. [사진 KBS 전주방송총국]

 '할미넴'은 전통 사회에서 여성과 맏이에게 강요하던 희생·복종·침묵을 주인공들 스스로 깨뜨리고 갈등을 치유하는 과정을 담았다. 폭탄 머리에 귀고리를 한 강씨에게 "랩은 취미로 하고 직장을 다녀야 한다"고 타박하던 아버지는 장남이 할머니들에게 랩을 가르치는 모습을 본 뒤 "아들에게 미안한 맘이 든다"고 했다. "아버지는 제가 뭘 하든 인정을 안 한다"고 했던 강씨는 자식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할머니들을 보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할머니들은 자식들도 잘 몰라 주던 고단한 삶을 강씨에게 고백하며 "이제라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겠다"고 선언한다.

 할머니들은 지난해 10월 순창군 '노인의 날' 기념식 때 열린 장기자랑 대회에서 자작곡 '할미넴'을 불러 참가상을 받았다. 할머니들은 "다음에 도전해서 1등을 하겠다"고 했다. 다큐는 이들이 "건강하면서 노래 부르고 싶어요"(박향자) "일만 하고 살았응게 앞으로는 그렇게 안 살라고요."(백성자) "우리 '할미넴' 노래 부른 거 전국노래자랑 나가믄 괜찮제."(오순례) "앞전에 울고 살았으니까 이제 웃고 살고만 싶어"(김영자) "저도 뭔가를 찾고 할머니들도 여기서 뭔가를 찾아서 행복해요."(강성균) 등을 다짐하며 '할미넴' 2기 멤버를 모집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할미넴'의 할머니 4명과 강성균씨가 지난해 10월 순창군 노인의 날 장기자랑 대회에 나가고 있다. [사진 KBS 전주방송총국]

'할미넴'의 할머니 4명과 강성균씨가 지난해 10월 순창군 노인의 날 장기자랑 대회에 나가고 있다. [사진 KBS 전주방송총국]

 제작진이 전하려던 메시지는 뭘까. 허 PD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겪고 있는 고령 사회와 청년 실업 문제의 해결책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 맹 PD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희화화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꿈을 꾸는 데 나이와 공간이 제약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송 작가는 "'할미넴'은 주류 사회로부터 외면받은 시골 할머니들과 지방 출신 청년이 힙합이라는 공통 목표 아래 서로의 삶을 위로하고 그 안에서 위안을 찾는 휴먼다큐이자 뮤직다큐"라고 했다.

 허 PD는 "방송 이후에도 할머니들이 힙합 모자를 쓰고 수차례 공연을 했다"며 "코로나19 여파로 2기 '할미넴' 래퍼는 모집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맹 PD로선 에미상 결선에 오른 건 이번이 두 번째다. 그가 2014년 제작한 '시대의 작창'이라는 판소리 3부작 중 1부가 그해 에미상 아트프로그래밍 부문 후보로 올랐지만, 수상에는 실패했다. 허 PD는 "국내에서 한 명의 작품이 에미상에 두 번 노미네이트가 된 건 처음"이라고 했다. 에미상 시상식은 다음 달 23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다.

'제48회 국제 에미상' 다큐 부문 결선에 오른 KBS 전주방송총국 휴먼뮤직다큐 '할미넴'의 한 장면. [사진 KBS 전주방송총국]

'제48회 국제 에미상' 다큐 부문 결선에 오른 KBS 전주방송총국 휴먼뮤직다큐 '할미넴'의 한 장면. [사진 KBS 전주방송총국]

전주·순창=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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