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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나가떨어질 기막힌 와인”…흑사병 견뎌내게 한 한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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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호 24면

[와글와글] 보카치오 『데카메론』

마피아의 세계를 그린 영화 ‘대부’에서 중요한 장면마다 세 가지 다른 술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스카치위스키, 결단의 시기에 마시는 남성적 술이다. 두 번째는 백포도주로 파티의 음료다. 반면에 붉은 포도주는 가족을 상징한다. 아버지 돈 비토 콜레오네(말론 브랜도)와 아들 마이클(알 파치노)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그런 경우다.

이탈리아 문화서 포도주 절대적 #중세 팬데믹 속에서도 위안 받아 #재난에 지친 사람에게 웃음 선사 #이야기 통해 회복탄력성 키워줘

“나는 평소보다 포도주를 더 마시고 싶구나.” “좋을 것 같아요, 아빠!”

영화 ‘대부’ 속 붉은 포도주 가족 상징

영화 ‘대부’의 한 장면. 영화에 나오는 붉은 포도주는 가족을 상징한다.

영화 ‘대부’의 한 장면. 영화에 나오는 붉은 포도주는 가족을 상징한다.

‘대부’는 남성적인 마초들의 세계를 담고 있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가족과 혈연을 중시하는 이탈리아계의 특성이 나타난다. 명연기를 펼친 배우 알 파치노, 로버트 드 니로와 함께 거장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역시 이탈리아계 후손이다. 현재는 캘리포니아에서 포도나무를 경작하고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이탈리아인들의 핏속에는 포도주라는 이름의 DNA가 흐르고 있는 걸까?

중세시대 유럽을 공포로 떨게 했던 흑사병의 와중에서도 이탈리아인들은 포도주를 마시며 위로를 받았다. 1348년 피렌체에 닥친 흑사병의 와중에 쓰인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그 생생한 현장을 담고 있다. 제목의 ‘데카’가 그리스어로 ‘10’을 의미하는 것처럼 이 책은 10이란 숫자를 근간으로 하고 있고, 작품에 등장하는 젊은 남녀도 모두 열 명(여자 7, 남자 3)이다. 10명이 피렌체를 벗어나 인근 피에졸레의 전원으로 피신한 뒤 10일 동안 들려주는 100가지 이야기 모음집이 바로 『데카메론』이다.

“그 휘몰아치는 전염병 앞에서는 어떤 인간의 지혜도, 대책도 소용이 없었지요. 특별히 임명된 공무원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오물을 청소했고 병든 자들은 도시에 들이지 않았으며 수많은 위생 지침이 고시됐지만 다 헛일이었습니다.”

작가 보카치오는 피렌체 인근에서 태어난 토스카나 사람이고 그곳에서는 포도주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 때문인지 작품 속에 열 명이 피신한 아름답고 쾌적한 전원주택에는 “고급 포도주를 넣어 둔 지하창고가 있었다”는 설명을 시작으로 산책 뒤에는 “최고급 포도주와 과자가 가벼운 피로를 풀어 주었다”는 표현이 반복된다.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엄중한 시기에도 포도주는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삶의 일부였다.

부의 과시를 상징할 때도 포도주는 등장한다. 큰돈을 번 피렌체의 빵장수 치스티가 보니파키우스 교황 특사 일행을 모시기 위해 “고급 백포도주를 담은 조그마한 볼로냐제 새 항아리와 반짝거리는 은으로 만든 잔을 두 개 준비시켰다”고 적고 있는데 다음 장면묘사가 인상적이다. “(교황사절단이 지나갈 때마다) 죽은 사람이라도 오고 싶을 만큼 맛있게 그 포도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마셔야 죽은 사람이 오고 싶게 만드는 것일까? 포도주를 진정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로 쓸 수 없는 문장이다. 그런 표현은 작품 곳곳에 있다.

“그리스도가 나가떨어지게 할 만한 기막힌 포도주가 있었다.”

“사형판결을 받은 죄수도 형장으로 갈 때는 원하면 얼마든지 포도주를 마시게 해 준다.”

작품의 배경이 이탈리아의 포도주 산업의 근간인 토스카나 지방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이탈리아 문화에서 포도주가 차지하는 절대적인 비중을 확인하게 된다. 『데카메론』은 위기에 맞서는 다른 방식을 제시한다. 고난과 재난의 한가운데서 예술과 작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엄숙, 근엄, 진지의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지쳐 있는 이들에게 웃음과 유머를 선사하여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일까?

작가 보카치오는 후자의 방식을 선택했다. 힘들수록 한두 잔의 포도주를 곁들인 재미난 이야기가 사회적 연대를 다지는 데 순기능을 한다고 믿었으니, 와인과 글의 만남인 ‘와글와글’ 정신을 실천한 작가다.

흑사병 딛고 르네상스 시대 개막 예고

『데카메론』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쉽게 체념하지 않는다. 밝고 활기찬 이야기, 심지어 수도원이나 수녀원 그리고 귀족사회에서 벌어지는 모순과 야한 이야기들까지 들려준다. 타락한 양반과 파계승들의 남녀상열지사를 야유한 속요나 『고금소총』(古今笑叢)을 읽는 듯하다.

재난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스토리텔링이라는 비장의 무기가 있고, 이야기를 통해서 회복탄력성을 키울 수 있다. 독일이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으로 신음하고 있을 때 그림형제가 『그림동화』를 썼던 것처럼, 보카치오는 팬데믹 시대에 불후의 명작을 창조해냈다.

책을 소각하라는 비난과 압력에 시달렸지만, 다행히 책은 살아남았다. 오래지 않아 피렌체는 기적처럼 흑사병의 잿더미를 딛고 다시 일어났으며, 어둡고 무거운 중세의 옷을 벗고 화사한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데카메론』은 그 예고편이었다.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를 지낸 인문여행 작가.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me,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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