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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나고 불안한 마음 다독일 방법 몰라 몸에 상처 낸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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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호 16면

[아이 마음 다이어리] 비자살성 자해

비자살성 자해 삽화

비자살성 자해 삽화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죽고 싶진 않지만 나쁜 기분 풀려” #자해 상담 청소년 2년 새 4.7배 늘어 #커터칼로 손목 긋던 15세 소현이 #엄마와 산책, 아이돌 영상 시청 #감정 조절법 훈련으로 자해 멈춰

알베르 카뮈의 작품 『시지프 신화』에 나오는 유명한 첫 구절이다. 책은 비록 자살에 대한 구절로 시작했으나, 결국 자살은 부조리에 대한 순응이고 삶은 부조리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하며 그래서 인생은 살 가치가 있다고 역설한다. 카뮈는 “자신의 삶, 반항,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것을 최대한 많이 느낀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최대한 많이 사는 것이다”라고 삶의 희망을 강조했다.

응급실에 내원하는 자살 시도 청소년 환자가 해마다 늘고 있다. 자살을 시도한 후 내 앞에 마주한 아이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이렇다. “도대체 제가 스스로 죽겠다는데 왜 죽지 못하게 하나요? 제 권리 아닌가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하루를 또 어떻게 버티지’라는 생각에 고통스러워요.” 나는 그때마다 답한다. “‘어떻게 버틸까’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지 말고 그냥 버티자”고. 네가 생존해있는 것 자체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고.

벼랑 끝 청소년, 살고 싶다는 신호

아이들이 말하는 죽고 싶은 이유는 다양하다. 이성 친구로부터 절교 선언을 당해서, 집단 따돌림을 당해서, 학업 성적이 떨어져서, 부모님께 혼나서, 선생님께 혼나서, 모든 게 억울하고 화가 나서 등이다. 대부분의 이유는 ‘살아가는 게 무의미해졌으니 죽는 게 낫다’는 것이다. 자살을 시도한 청소년 중 많은 경우가 죽고 싶지만 동시에 살고 싶다는 신호를 보낸다. 그래서 자살 시도 직전 친구에게 전화하기도 하고 부모에게 자살 시도 사실을 알리기도 한다. 그래서 생존한 아이들에게는 도움을 요청한 행동에 대해 칭찬하고 격려한다.

자살은 많은 화두를 던진다. 카뮈가 말한 것처럼 철학적 문제일 수도 있고, 어린 청소년의 경우 가족이나 주변 환경,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적 행동일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자살 시도 청소년을 평가할 때 ‘정말 죽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는지’에 대해 확인하는 과정을 꼼꼼히 거친다. 처음에 자살 의도를 갖고 시도했으나 생존 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아이들도 있고 애초에 자살 의도가 뚜렷하지 않은 아이들도 의외로 많다. 최근 몇 년간 자신의 신체에 상처를 내는 청소년이 급증했다. 자해한 청소년에게 가장 처음으로 묻는 말은 자살에 대한 의도가 있었는지 아닌지다. 아이는 죽고 싶어서 한 행동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저 스스로 낸 상처에서 스며 나오는 피를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지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다고 말한다.

과연 자살 의도가 없다는 아이의 말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또는 명백히 죽음에 이를 정도의 상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죽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도 있다. 이 경우는 자살 의도와 자해가 연관이 있다고 봐야 할까. 쉽게 답하기 까다로운 질문이다.

15살 소현(가명)이는 한여름인데도 긴 소매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엄마와 나란히 앉은 소현이의 얼굴은 담담했다. 엄마가 병원을 찾은 이유를 말하는 동안 묵묵히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자리가 익숙한 듯 엄마의 말에 고개를 가끔 끄덕이기도 했다.

“선생님, 아이가 반복적으로 자해를 해왔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어요. 아이 말로는 이러기 시작한 지 1년이 넘었다고 하네요.” 엄마는 힘겹게 입을 떼며 말했다.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내가 물었다. “소현이가 한여름인데도 긴 팔만 입고 다니고, 반소매 입을 때는 면적이 넓은 가죽 팔찌를 여러 개 겹겹이 차고 다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아이가 자는 동안 팔을 봤어요. 그랬더니 손목에서부터 팔꿈치 안쪽에 이르기까지 가로로 수십줄 이상 칼로 얕게 낸 상처를 발견하게 됐어요.”

“소현아. 선생님이 팔을 좀 봐도 될까?” 아이는 큰 저항 없이 긴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손목에 겹겹이 가죽 팔찌를 차고 있었다. 본인이 스스로 팔찌를 풀었다. 아이의 손목 안쪽으로부터 약 10㎝ 위까지 희미해진 자해 흔적과 커터 칼로 그은 지 얼마 안 된 새로운 자해 흔적이 혼재돼 있었다. 비자살성 자해(non-suicidal self injury)란 자살에 대한 의도가 없이 자신의 신체에 고의로 상해를 입히는 행동을 말한다. 손목에 커터칼 긋기, 자기 신체에 화상 입히기, 스스로 자신의 신체를 때리기 등이 포함된다. 과거에는 이러한 자해 행동도 자살 시도의 약화한 한 형태로 간주하여 치료 과정이 자살 시도 환자와 유사하게 진행됐다.

최근 10년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어 비자살성 자해 행동에 대한 진단 기준이 정립됐다. 이는 자살 의도가 없는 자해 환자들에 대해 보다 심층적인 평가와 치료가 필요하다는 데 전문가들이 인식을 같이했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의 자해 빈도는 대략 18~20%에 이른다.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 통계에 의하면, 2017년에서 2019년 사이 자해를 호소하는 청소년 상담 건수는 4.7배 증가했다. 이는 자살에 대한 상담을 뛰어넘는 수치이기도 하다.

비자살성 자해 행동의 진단

비자살성 자해 행동의 진단

필자가 최근 5년간 자해 행동으로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내원한 청소년들을 분석한 결과, 약 230명의 자해 행동 청소년 중 절반 이상이 두 차례 이상 반복 자해를 했고 80% 이상이 기저에 우울증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자살의도를 지닌 자해 청소년들과 비자살성 자해 청소년들 모두 우울증 치료를 위해 처방 받아 복용해온 약을 한꺼번에 음독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자살 의도가 없는 자해 행동일지라도 사고로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라는 차원에서 비자살성 자해 행동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반드시 치료해야 한다.

“소현아, 커터칼로 팔 그은 거 왜 그랬어? 죽고 싶은 마음에서 그랬어?”

“죽고 싶었던 적은 있었지만 팔 그은 건 그래서 한 건 아니에요. 팔에 상처를 내면 좀 마음이 편안해지거든요.”

소현이는 기분이 좋지 않고 답답한 마음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자해를 하면 기분이 해소된다고 말했다. 부모는 소현이가 반복적으로 자해를 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무서운 마음과 동시에 아이가 밉고 화가 났다고 했다. 아버지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너 팔 그어도 안 죽는다는 거 알고 이러는 거잖아. 왜 바보 같은 행동을 하니?”라며 소현이를 몰아붙이고 비난했다고 고백하며 후회했다.

자해하는 청소년의 대부분은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낸다. 역설적으로 자해해야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자해하고 반복해서 그 행동에 의존한다. 대부분의 자해 청소년은 감정조절이 어렵고 나쁜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어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해서 나쁜 기분과 불안한 마음을 해소하고 싶은데 딱히 방법을 못 찾겠다고 하소연한다.

반복 자해 위험 … 반드시 치료해야

이런 자해 청소년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시행하는 치료 기법은 변증법적 행동치료다. 변증법적 행동치료는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을 통해 수용과 변화라는 두 요소를 결합하고 감정적 자기조절 기술을 조합한 치료다. 즉, 아이의 취약한 감정조절 능력을 받아들이는 ‘수용’과 자해 행동 대신 건강한 문제 해결 방법으로의 ‘변화’를 결합한 방식이다.

아이의 감정 조절을 위해 훈련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자신의 나쁜 감정을 알아차리고 그 감정에 이름 붙이기 ▶나쁜 감정을 변화시키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를 파악하기 ▶감정에 영향받는 빈도 줄이기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일을 늘리기 등이다. 나는 소현이에게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인해 자해 충동이 올라올 때 가까운 사람에게 신호를 보내도록 교육했다. 나쁜 기분이 들면 자동으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냈던 예전 상태에서 적어도 부정적인 감정을 스스로 인식하고 누군가에게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상태가 됐다. 이제 소현이는 기분이 답답할 때면 자해 대신 엄마와 함께 산책하거나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의 영상을 본다. 어느덧 소현이가 자해하지 않은 지 2년 째다.

※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등장인물을 가명으로 처리했고, 전체 흐름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일부 내용을 각색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천근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교수
연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 영국 국제인명센터(IBC)가 ‘세계 100대 의학자’로 선정. 저서로는 『아이는 언제나 옳다』, 『엄마 나는 똑똑해지고 있어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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