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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테스형, 도시는 왜 이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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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시속 23.8㎞. 한강공원의 자전거 속도겠다. 변속기어 장착하고 쫄바지를 걸쳤는데 이 속도면 느리다고도 해야겠다. 그런데 이게 백 마리 넘는 말들이 힘을 합쳐 뛴 속도다. 서울시 자동차 평균 주행 속도.

최첨단 장비로 무장한 자동차 #수백 마력 엔진으로 마차 속력 #연료와 시간 낭비의 도시구조 #실시간 연동 도시 시스템 필요

2019년 서울시 등록 자동차는 312만대다. 그중 승용차가 267만대다. 일상으로 접하는 그 승용차의 정체를 가정하자. 배기량 2000cc의 현대 쏘나타라면 큰 무리는 없겠다. 이게 160마력짜리 마차다. 그렇다면 지금 서울시에 4억 3천만 마리의 말이 뛰어다니는 중이다.

서울시는 전체 자동차 운행 거리 통계도 알려준다. 이걸로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산수를 하면 알기 쉬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계산하면 승용차 한 대의 연간 주행거리는 1만 1천㎞를 약간 넘는다. 하루에 평균 31㎞ 주행이다. 쏘나타 마차 값이 3천만 원이라면 말 한 마리 값은 19만 원 정도다. 연비가 리터당 13㎞정도라니 연간 여물값은 요즘 유가 기준으로 마차당 백만 원, 말 한 마리당 6천 원이 좀 넘는다. 이전 시대에 상상 못 하던 저렴한 호사다. 그런데 이 여물이 화석연료라 재생 불가능하고 죄 이산화탄소로 배출되어 지구를 덮는 게 문제다.

마차당 하루 주행시간은 1.3시간 정도다. 마부들은 일 년이면 이십 일 정도를 마부석에 앉아 보낸다. 문제는 나머지 시간이다. 일 년의 345일간 말들이 할 일 없이 서 있다는 이야기다. 즉 4억 2천만 마리의 말들은 항상 어딘가에서 잠을 자든 여물을 먹든 놀고 있는 중이다. 이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건물마다 다르나 주차장법에서는 대개 면적 150㎡당 주차장 한 면 설치를 요구한다. 설계를 해보면 건물 지하에 주차장 한 면 설치하는데 35~40㎡ 정도가 필요하다. 진입로와 기계환기 장치 공간들이 포함된 면적이다. 자동차는 지표면에 가까운 공간을 요구하고 그런 곳은 땅값도 비싸니 마차보다 마구간 값이 훨씬 비싸다. 그래서 건물 만들 때 마구간 설치에 인색해진다. 법규 기준 이상으로 주차장을 설치하지 않는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서울시의 주차장 보급률은 136%다. 서울시 전역이 주차문제로 골머리인데 주차장은 저처럼 여유가 있다니. 답은 마차가 이동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몰고 나갔다가 다소곳이 집에 돌아오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출발지와 목적지에 주차장이 한 면씩 필요하다. 그래서 모든 마차는 하나가 아니라 두 면의 주차장을 요구한다. 그래서 서울의 주차장은 64% 공급 과부족이다. 종로구·중구·용산구 합친 바닥 면적이 주차장으로 추가 필요하다. 마구간 못 찾은 마차들은 결국 길 위 어딘가에 서있어야 한다. 그곳은 후미진 골목이나 인도 위일 가능성이 높다. 인구 천만 명인 도시에서 125만대 마차를 끌던 2억 마리 말들이 마구간도 길도 아닌 어딘가를 배회하는 중이다. 그래서 서울시의 보행환경은 아주 좋지 않다.

자동차 발전은 눈부시다. 블랙박스는 물론이고 온갖 센서로 무장한 상태다. 시간과 에너지 소모를 마른 수건 짜듯 줄여준다. 연비 증진을 위해 정차 중에는 엔진이 꺼지기까지 한다. 게다가 자동차마다 장착한 저 내비게이션은 놀라운 예지로 합리적인 길을 인도한다. 인공위성들이 알려주는 위치 정보를 상대성이론으로 계산하여 빅데이터를 근간으로 최적 알고리즘으로 해석해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물건이란다. 그런데 그 최첨단 기계가 알려주는 길을 따라가다 눈을 들면 가끔 엉뚱한 현실을 만난다. 빨간 신호등.

서울시의 신호등들은 시간대 실시간 제어라는 체계로 운용된다고 쓰여있다. 멋진 용어다. 요일과 시간대별로 데이터베이스를 입력하여 정해진 시간에 자동으로 빨간 불이 켜진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실시간 교통상황이 아니라 과거의 교통상황을 근거로 작동한다는 이야기. 지금 운전자들이 사용하는 내비게이션이 지난 통계에만 근거해 최적의 경로라고 알려준다면 그 업체는 이미 도산했을 것이다.

지난 세기 국토의 구조를 바꾼 것이 기차다. 개항 후 제물포 노량진 간 시속 20㎞였던 기차 속도는 300㎞가 되었다. 도시의 구조를 바꾼 것은 자동차다. 자동차 덕분에 도시가 커졌고 자동차 없이 도시가 작동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지금의 도시는 좀 이상하다. 다음 세대의 자동차는 배설물 없는 말이 끌고 마부도 필요없다고 한다. 그런데 저런 첨단 기계들이 결국 마차 속도로 돌아다니는 도시라면 구조적인 문제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 도시가 불합리하고 비능률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겠다.

텅 빈 길에서도 빨간 신호등은 껌뻑껌뻑 켜진다. 악법도 법이다. 테스형이 툭 내뱉고 간 말에 수많은 마부들은 브레이크를 밟는다. 그래서 시속 19.6㎞. 이건 서울시 중구의 평균 자동차 속도다. 스마트시티가 화두고 정보화에 미래가 있다는 세상이다. 과거형 자동점멸 신호시스템이 자동차 공회전 부추기고 이산화탄소발생 높인다. 백 마리 말을 몰아도 여전히 마차 속도를 내는 도시라면 테스형, 도시는 왜 이래.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