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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존재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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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장혜수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장혜수 스포츠팀장

장혜수 스포츠팀장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스 선동열은 2년 차였던 1986년, 39경기에 나와 24승 6패, 평균자책점 0.99를 기록했다. 주로 선발 투수였지만, 가끔 마무리로도 나왔다. 6세이브, 이 부문 4위였다. 19경기를 완투했고, 그중 완봉이 8차례였다. 96년 일본 진출 전까지 11년간 146승 40패, 132세이브, 평균자책점 1.20이었다. 그런데 이런 숫자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게 있다. 선동열의 ‘미친 존재감’이다. 존재감만으로 상황을 끝냈다. 이를 보여준 사례가 있다.

마무리로서 선동열의 위력을 깨달은 김응용 해태 감독은 새 활용법을 찾았다. 선취점을 뽑으면, 선동열을 불펜에 보내 몸을 풀게(푸는 시늉하게) 했다. 상대는 조급해진다. 1988년 해태와 빙그레 이글스의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 선동열은 잘 던지다가 7회 갑자기 마운드를 내려갔다. 손가락에 물집이 잡혀서다. 해태는 2-0으로 이겼지만, 선동열의 이후 등판이 불투명했다. 시리즈 전적 2승으로 앞선 해태는 3차전에서 2회 선취점을 뽑았다. 4회 선동열이 불펜에 등장했다. 마음이 급해진 빙그레는 한 점도 뽑지 못하고 졌다. 선동열은 몸을 풀다(푸는 시늉하다) 들어갔다. 실제로는 아파서 던질 수 없었다고 한다. 해태는 4승 2패로 우승했다. 선동열이 나온 건 1차전뿐이었다.

1992년 해태 시절 역투하는 선동열. [중앙포토]

1992년 해태 시절 역투하는 선동열. [중앙포토]

‘존재감’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 사물, 느낌 따위가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 느낌’이다. 원래 ‘있다’, ‘크다’, ‘묵직하다’ 등과 함께 쓰인다. 요즘은 ‘미친 존재감’처럼 ‘미치다’와 함께 많이들 쓴다. 이 표현은 2007년 한 스포츠 잡지가 처음 썼다.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도 썼지만, 역시 스포츠 쪽에 잘 맞는 표현이다.

최근 ‘미친 존재감’을 보여준 두 가지 사례가 있다. 19일 열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홋스퍼-웨스트햄 유나이티드전. 경기 시작 45초 만에 선제골을 터뜨린 토트넘 손흥민은 3-0으로 앞선 후반 35분 교체아웃됐다. 토트넘은 그 이후 내리 세 골을 내줬고, 경기는 3-3 무승부로 끝났다. 손흥민의 빠른 발을 경계해 웨스트햄 수비진은 밀고 올라가지 못했다. 손흥민 교체로 족쇄가 풀리자 반격에 나섰다. 손흥민 ‘미친 존재감’의 역설이다. 다른 사례는 11년간 해외에서 뛰다 돌아온 여자 프로배구 흥국생명 김연경이다. 공중파 TV가 김연경 출전 경기 중계에 나섰다. 인터넷 중계에는 평일 낮에도 수십만 접속자가 몰렸다. 종목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미친 존재감’이다.

불광불급(不狂不及). ‘그 일에 미쳐야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선동열, 손흥민, 김연경의 ‘미친 존재감’이 어디서 왔겠나. 그들은 자기 일에 미쳤고(狂), 그랬기에 ‘미친 존재감’에 미칠(及) 수 있었다.

장혜수 스포츠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