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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기사 잇딴 사망, ‘무법지대’ 결국 터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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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지난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에 있는 CJ대한통운 강남2지사 터미널의 작업장에서 택배기사들이 배달할 물건을 분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뉴스1]

지난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에 있는 CJ대한통운 강남2지사 터미널의 작업장에서 택배기사들이 배달할 물건을 분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뉴스1]

“사과드립니다.” 박근희 CJ대한통운 부회장이 택배기사 사망 사건과 관련해 두 번 고개를 숙였다. 박 부회장은 22일 기자회견을 열고 사과문을 발표했다. 올해 과로사로 추정되는 택배기사 13명 중 6명이 이 회사 소속이다. CJ대한통운은 이날 ‘택배 종사자 보호 대책’도 내놨다. 다음 달부터는 택배 분류를 지원하는 인력 3000명을 추가로 투입한다. 내년 상반기에는 모든 택배기사가 산업재해보험에 가입하도록 권고하기로 했다.

CJ대한통운, 사망사건에 공식 사과 #“택배 분류 3000명 보강” 대책 내놔 #택배기사 보호할 법 없는 사각지대 #본사 아닌 대리점과 계약맺고 일해 #직고용 유보, 근본적 해결엔 한계

여기에는 연간 500억원의 비용이 추가로 들어간다고 CJ대한통운은 예상했다. 택배 분류를 지원하는 인력이 많아지면 택배기사들의 근무시간이 줄어들 뿐 아니라 출근 시간을 현재보다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다. 평소보다 많은 물량을 배달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택배기사 3~4명이 팀을 이뤄 물량을 분담하는 방식도 도입하겠다고 CJ대한통운은 밝혔다.

CJ대한통운이 악화하는 여론에 밀려 급하게 대책을 내놨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지적이 업계에서 나온다. CJ대한통운이 추가로 투입한다는 3000명의 분류 지원 인력도 직접 고용은 아니다. 산재보험 가입은 권고이기 때문에 강제성이 없다. 익명을 요구한 한 택배기사는 “분류 지원 인력의 추가 투입은 환영할 일”이라면서 “산재보험 가입은 택배기사들이 비용을 부담해야 하므로 무조건 들라고 하는 것은 이견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박근희 CJ대한통운 부회장이 22일 택배 노동자 사망 사건과 관련해 사과하고 있다. [뉴스1]

박근희 CJ대한통운 부회장이 22일 택배 노동자 사망 사건과 관련해 사과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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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기사는 개인 사업자가 운영하는 대리점과 계약을 맺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본사가 관여할 의무가 없다는 점이 한계다. 국내 주요 택배사는 고객이 맡긴 택배를 모아서 처리하기 위해 ‘허브’(중심) 터미널과 지역별 터미널을 운영한다. 대리점은 택배기사를 고용해 지역별 터미널에서 물건을 받아 배송한다. 개인 사업자(대리점)와 개인 사업자(택배기사)의 계약이기 때문에 대리점마다 수수료율이 다를 수 있다. 대리점주와 친한 택배기사는 상대적으로 배달이 쉬운 구역을 배정받기도 한다. 22일 CJ대한통운의 기자 간담회에선 “택배기사를 직접 고용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정태영 CJ대한통운 택배부문장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답변을 유보하겠다”고 답했다.

택배 사업은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직영 체제로 운영했지만 2000년대 들어 대리점 체제로 자리를 잡았다. TV 홈쇼핑과 인터넷 쇼핑이 빠르게 늘면서 택배 처리 물량이 급증한 게 배경이다. 올해 상반기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영향으로 택배 물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0% 증가했다.

한 택배회사 관계자는 “급증하는 물량을 소화하려면 허브 터미널 확대나 자동화 장비 도입 등 대규모 투자가 불가피하다”며 “모든 걸 직영으로 하면 고정비용이 많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최근 택배기사를 추가 모집하고 있지만 지방에선 인력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곳도 있다”고 덧붙였다.

일부 정치권에선 택배 종사자를 보호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점도 문제라고 보고 있다. 박홍근(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근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택배기사에게 계약갱신 청구권(6년)을 보장하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택배 산업을 지원해야 한다는 내용을 법안에 담았다.

20년간 택배물량 42배 늘었는데 단가는 반토막, 출혈경쟁 여전 

업계에선 “운송 계약을 6년간 보장하는 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고 반발한다. 익명을 요구한 택배사 관계자는 “대리점이 오죽하면 택배기사를 자르겠냐”며 “근태가 불량하거나 다른 문제가 발생하면 누가 처리하겠냐”고 말했다.

택배요금의 인상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지금처럼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의 법칙으로 가격을 결정하는 구조에선 현실적으로 택배요금을 올리기가 어렵다. 주문 물량을 따내려는 택배 업체들의 경쟁이 워낙 치열하기 때문이다. 결국 택배 단가를 낮추는 출혈 경쟁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업계에서 나온다.

택배 단가는 꾸준히 내려가고 있다. 한국통합물류협회에 따르면 택배 평균 단가는 98년 3789원에서 2018년 2229원으로 낮아졌다. 20년간 택배 단가가 41% 내렸다는 뜻이다. 같은 기간  택배 물량은 5795만개에서 25억4300만개로 늘었다. 20년간 택배 물량 증가율은 4288%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택배 노동자의 근로환경과 처우를 개선하는 데 드는 비용은 결국 사용자와 소비자가 분담해야 한다”며 “택배요금을 올리기 위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지역별·무게별로 택배 단가를 차등화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덧붙였다. 이상민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택배기사는 개인 사업자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며 “표준 계약서에 택배기사의 업무 범위나 노동조건 등을 구체적으로 담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추인영·배정원 기자 chu.i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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