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돈 모아 집 사란 말은 공허" 2030 대화 시작과 끝이 아파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2면

대기업에 다니는 박종영(37) 씨는 지난해 12월 서울 흑석동 아파트를 12억6000만원에 샀다. 전세 6억5000만원을 낀 소위 갭투자다. 살던 집 전세금(4억원)을 빼고, 월세로 전환했다. 신용대출까지 받았으니 상당히 무리했다. 당시엔 의견이 다른 아내와 다툼도 많았다. 박씨는 “집을 살 마지막 기회라는 판단 때문이었는데 돌아보면 최고의 선택을 한 것 같다”며 “올해 이 부동산 대란을 겪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급격한 집값 상승으로 젊은 층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셔터스톡

급격한 집값 상승으로 젊은 층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셔터스톡

요즘 20~30대가 모이는 자리에서 부동산 토크가 빠지지 않는다. 다소 과장하자면 대화의 시작과 끝이 아파트다. 젊은 층에 ‘모아서 나중에 집 사란’ 말은 공허하다. 정부가 23번의 부동산 대책을 내놓는 동안 집값은 급등했고, ‘집 사지 말라’는 신호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이들의 상대적 박탈감만 커졌다. “법인과 다주택자 등이 보유한 주택 매물이 많이 거래됐는데 이 물건을 30대가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로 받아주는 양상이 안타깝다”는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의 말이 먹히지 않는다.

[초저금리, 2030 슬픈 노마드](中) #'영끌 전쟁'엔 이유가 있다

집값 상승이 자산 증식 속도 추월

영끌 투자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일단 집 장만 공식이 무너졌다. 이전까진 결혼하면서 전셋집을 구했다가 40~50대에 전세금과 저축, 대출금을 모아 집 한 채 마련하는 것이 서민의 일반적인 삶이었다. 이 공식이 통했던 건 고금리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집값 상승 속도보다 자산 증식 속도가 빠르면 집을 나중에 사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라면 고민이 깊어진다. 박씨는 “지난해 치솟는 집값을 보면서 계산기를 두드렸는데 답이 없었다”며 “넋 놓고 있다가는 평생 남의 집 살이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가계대출금리.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가계대출금리.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저금리 역시 소위 ‘막차론’에 힘을 실리는 이유다. 대출금리가 낮으니 부채에 대한 두려움이 덜하다. 8월 가계대출 금리는 2.55%로 역대 최저치까지 떨어졌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이다. 이러니 빌린다. 가계가 8월 한 달 동안 은행에서 끌어다 쓴 대출은 12조원 가까이 증가했다. 2004년 통계 작성을 시작한 이래 가장 많은 액수다. 9월에도 10조원 가까이 늘었다. 주택담보대출은 물론이고 신용대출도 유례없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8월에 5조7000억원, 9월에 3조원가량 늘었다.

“시기 놓치면 안 돼” 세대 내 경쟁심리 작동 

전문가들은 신용대출로 조달한 돈이 크게 두 가지 목적으로 쓰였다고 본다. 공모주 청약 열풍에 따른 주식투자 용도와 부족한 주택 자금을 신용대출로 메우려는 수요다. 지난 4월 9억5000만원에 경기도 광교 아파트를 산 이은샘(38) 씨는 “돈이 모자라 1억4000만원 정도 신용대출을 받았는데 다행히 금리가 낮아 큰 부담은 없다”며 “다만 이렇게까지 했는데 집값이 내려가는 건 아닐지 걱정되긴 한다”고 말했다.

서정렬 영산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는 세대 내 경쟁심리가 작동하면서 영끌 전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어디선가 균열이 생기면 집값이 하락할 가능성도 있다”며 “30대가 자녀 양육 등으로 지출이 많다는 점을 고려할 때 지금의 흐름은 긍정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씨마른 전세...월세가격 급등.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씨마른 전세...월세가격 급등.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월세 전환 가속화로 주거비용↑

주거비용 증가에 따른 현실론도 작동한다. 금리가 낮아지면서 전통적인 전세 시장은 월세로 재편 중이다. 경기도 분당 아파트를 전세로 준 최규호(65) 씨는 내년 3월 현 세입자가 나가면 월세로 전환할 계획이다. 최씨는 “전세금을 받으면 정기예금이나 주가연계증권(ELS) 같은 거로 굴렸는데 이젠 목돈을 받아봐야 골치만 아프다”며 “새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시행되면서 집주인을 압박하는 듯한 분위기도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세입자 입장에선 조달금리가 낮을 땐 당연히 전세가 유리하다. 그러나 최근 전세 물량은 씨가 말랐다. 전세 대란의 불씨는 월세 상승으로 이어진다. 국민은행 월간 주택가격동향에 따르면 9월 서울 아파트 월세 상승률은 전월(0.12%)보다 대폭 오른 0.78%에 달했다. 조사를 시작한 2015년 12월 이래 가장 높은 수치다.

관련기사

내년 2월 전세계약이 만료되는 직장인 최수호(30) 씨는 벌써 걱정이 크다. 월세로 전환할 경우 약 80만~100만원가량의 추가 지출이 불가피해서다. 최씨는 “이러니 서둘러 집을 갖고 싶은 생각이 안 들겠느냐”며 “집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부의 격차가 더 빨리, 더 크게 벌어지는 것 같아 서글프다”고 말했다.

대출은 막혔고 청약에 목 매지만

집이 ‘살 곳’이냐, ‘살 것’이냐의 논쟁을 차치하더라도 매수자 입장에선 오를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방보다는 서울·수도권으로, 구축보다는 신축으로 몰리는 게 당연하다. 경기도 안양에서 신혼부부 특별청약을 받은 정다운(35)씨는 요즘 얼떨떨한 기분이다. 분양가 6억원짜리 아파트가 입주도 하기 전에 10억원이 됐기 때문이다. 정씨는 “주변에서 로또라고 축하해줘 기분이 좋지만, 솔직히 돈을 이렇게 벌어도 되는 건지 무서운 생각도 든다”며 “실수요든 투기든 청약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전세 품귀와 전셋값 폭등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18일 잠실의 한 아파트 단지 상가 내 부동산에 매물 정보란이 텅 비어 있다. 연합뉴스

전세 품귀와 전셋값 폭등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18일 잠실의 한 아파트 단지 상가 내 부동산에 매물 정보란이 텅 비어 있다. 연합뉴스

기존 아파트를 사려면 대출이 중요한데 수도권 많은 지역이 규제지역으로 묶여 있다. 대출액이 적으니 어느 정도 목돈이 있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청약에 기대지만 인기 지역에서 30대가 세대 간 경쟁을 뚫는 건 매우 어렵다. 만 30세부터 산정하는 무주택기간과 부양가족 점수에서 밀리는 게 당연해서다. 실제로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서울 일반분양물량 중 1순위 청약에 당첨된 30대 비중은 전체의 10.4%에 그친다.

내몰리듯 내 집 전쟁에 참전하려고 해도 집을 사는 일 역시 쉬운 게 아니란 의미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청년들이 살만한 곳, 교육 환경을 갖추고 출퇴근이 편한 곳에 공급을 늘리는 게 지극히 당연한 해법”이라며 “은행이 전체 한도 내에서 연령별로 LTV(주택담보대출비율)를 달리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유연한 규제 도입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