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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첫 주먹 잘 때리면 백 대 피한다”며 선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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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중국의 눈에 비친 한국전쟁과 참전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이 19일 베이징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에서 개막한 한국전 참전 70주년 전람회에 참석했다. 그는 ’70 전 영웅적인 중국인민지원군이 정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조선(북한) 인민·군대와 함께 생사를 잊고 피흘려 싸워 (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운) 항미원조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둬 세계 평화와 인류진보사업에 거대한 공헌을 했다“고 주장했다. [신화=연합뉴스]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이 19일 베이징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에서 개막한 한국전 참전 70주년 전람회에 참석했다. 그는 ’70 전 영웅적인 중국인민지원군이 정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조선(북한) 인민·군대와 함께 생사를 잊고 피흘려 싸워 (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운) 항미원조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둬 세계 평화와 인류진보사업에 거대한 공헌을 했다“고 주장했다. [신화=연합뉴스]

“1950년 6월 25일 조선(북한) 내전이 폭발하고 미국이 무장간섭과 동시에 대만 해협에 침입했다.”

‘미국에 맞서 북한 도운 전쟁’ 규정 #미·소 체제속 위상 강화하려 참전 #자국 중심 중화주의 세계관의 유산 #한국전쟁을 ‘자신의 전쟁’ 인식

18일 중국중앙방송(CC-TV)이 방영한 다큐멘터리 6부작 ‘평화를 위해(爲了和平)’ 1부 도입부 해설이다. 중국은 지금도 한국전쟁을 ‘미국의 침략에 맞서 조선을 도왔다’며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10월 19일 남만주 일대의 인민해방군 동북변방군이 ‘인민지원군(이하 지원군)’이란 기치를 내걸고 압록강을 건넜다. 25일 국군과 연합군을 선제 기습, 운산 일대에서 첫 전투를 벌였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 70주년을 맞아 중국의 참전을 역사적 관점에서 재조명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동의한 것은 1950년 5월 중순이었다. 김일성은 1949년부터 자신의 침략 계획에 대해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지지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국가를 수립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이하 중공) 지도부는 한반도에서의 대규모 전쟁 발발을 원하지 않았다. 1950년 1월에 스탈린이 중국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을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하자, 결국 마오쩌둥도 입장을 바꿔 김일성의 계획을 승인했다.

중국중앙방송(CC-TV)이 방영 중인 한국전쟁 참전 70주년 기념 6부작 다큐멘터리 ‘평화를 위해(爲了和平)’ 포스터. [해방군보 SNS 캡처]

중국중앙방송(CC-TV)이 방영 중인 한국전쟁 참전 70주년 기념 6부작 다큐멘터리 ‘평화를 위해(爲了和平)’ 포스터. [해방군보 SNS 캡처]

마오쩌둥이 만만치 않은 국내 상황에도 불구하고 결국 북한의 남침을 지지한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체제와 이념의 대립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에서 보면, 같은 공산주의 혁명 정당으로서의 연대의식이나, 아시아 최대의 공산주의 국가로서의 사명감도 한 요인이 됐을 것이다. 실제 스탈린은 마오에게 아시아 공산주의 혁명의 맹주 지위를 부여한 바 있다.

여기에 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넌 배경은 또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야 한다. 북한의 남침을 외교적·물질적으로 지원하는 것과 실제 병력을 파견해 참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여서다. 그해 10월 상반기까지 중공 수뇌부에서 실제 참전 여부를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공이 ‘지지’의 차원을 넘어 ‘동참’의 단계로 넘어간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국의 안보에 대한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연합군이 신속하게 북상하면서 빠른 속도로 중국과 북한의 경계를 향해 접근해왔고, 위기의식을 느낀 중국은 연합군을 한반도 안에서 막기 위해 압록강을 건넜다. 중요한 점은 당시 중국이 연합군의 북상을 자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참전까지 결정한 데에는 나름의 역사적 맥락이 작용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일본 지원에 위기감 고조

1952년 펑더화이(彭德懷 )가 북한 평 남 회창에서 북중 부대 간부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오른쪽부터 덩화(鄧華), 천겅(陳賡), 펑더화이, 박일우(朴一禹·북한 내무상), 간쓰치(甘泗淇), 리전(李貞), 왕정주(王政柱). [사진 이미지차이나]

1952년 펑더화이(彭德懷 )가 북한 평 남 회창에서 북중 부대 간부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오른쪽부터 덩화(鄧華), 천겅(陳賡), 펑더화이, 박일우(朴一禹·북한 내무상), 간쓰치(甘泗淇), 리전(李貞), 왕정주(王政柱). [사진 이미지차이나]

1949년 10월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기 전부터, 중국 사회에서는 이미 한반도를 통한 외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이 퍼져 있었다. 1940년대 초부터 중국에서는 항일전쟁 이후의 국가 재건 방향을 둘러싸고 다양한 논의가 전개됐다. 특히 중국에 대한 미래의 군사적 위협을 어떻게 전망할 것이냐는 문제는 전후의 국방 전략을 구상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논점이었다. 100년 전 아편전쟁 이후로 중국에 대한 위협은 주로 동남의 해양 방면에서 제기되었다는 점에 착안해, 미래 위협 역시 해상에서 제기될 것이라는 관점도 있었다. 그러나 2000년 넘는 중국 역사를 보면 바다보다는 주로 북방 대륙을 통한 군사적 위협이 중심이었다. 그래서 전후 미래의 군사 위협도 대륙을 통해 제기될 것이라는 전망이 더 우세했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북방에서 제기되는 위협의 방향은 북송(北宋)을 기준으로 서북 방면으로부터 동북 방면으로 옮겨갔다. 이 추세는 20세기에도 이어져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연결됐다.

이 관점은 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이어졌다. 일본이 비록 패망했지만, 언제든지 부활해 과거와 마찬가지로 한반도를 거쳐 중국의 동북 방면을 위협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퍼져 있었다. 특히 이러한 불안감은 미국이 일본 점령 정책의 기조를 바꿔 일본을 동아시아 전략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일본의 경제 부흥을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고조됐다. 미국의 지원과 일본의 부흥, 그리고 그로 인한 일본의 한반도 및 중국 침략 가능성에 대한 위기감은 1948년 중국 사회에서 반미운동을 촉발했다. 중국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전쟁은 어쩌면 이런 오래된 불안이 현실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번에는 위협의 주체가 일본이 아닌 미국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중국은 한국전쟁을 ‘남의 전쟁’이 아니라 ‘자신의 전쟁’으로 사유했다는 점이다. 연합군의 북진을 중국 동북 변경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는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한국전쟁을 ‘제국주의 세력’의 전반적인 중국 침략 기획의 한 부분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한국·대만·베트남은 세 자루 칼날

당시 마오쩌둥은 미국 제국주의 세력의 중국 포위 전략을 ‘세 자루 날카로운 칼(三把尖刀)’에 비유했다. 즉, 한반도와 대만해협, 베트남 세 방향에서 중국을 포위하려는 전략이다.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미국이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했고, 베트남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프랑스가 베트남민주공화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중공의 관점에서 한국전 참전은 전체적인 반(反)제국주의 전쟁의 일부였고, 자기 자신의 전쟁이기도 했다. 결국 마오는 “첫 주먹을 잘 때리면 백 대를 피할 수 있다(打得一拳開 免得百拳來)”는 논리를 앞세워 결단을 내렸다(『마오쩌둥 연보』 1권 p.230).

이는 중국의 참전을 냉전 시대 체제 대립의 이분법적인 틀을 넘어서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은 멀리는 전통시대부터 세계를 ‘중외(中外)’, 즉 ‘중국과 그 바깥’으로 인식하고 표현해왔다. 이처럼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사고하는 관념은 중화주의의 문화적 전통을 형성했다. 20세기 중국에서도 중화주의의 유산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마오가 1946년 제기한 ‘중간지대론’이 일례다. 미국과 소련 사이의 광범위한 중간지대를 둘러싼 미국과 지역 인민의 대립이 당시 세계 정세의 핵심 모순임을 주장한 마오 특유의 ‘모순론’이다. 미·소 양극화 속에서도 중국의 독자적인 위상과 역할을 확인하고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이 관점으로 중국의 한국전 참전을 보면, 배경에는 냉전 시대의 체제 대립 외에도 ‘자국 중심의 세계 인식’이라는 오래된 유산이 자리했다. 최근 중국이 BTS의 발언을 문제 삼은 까닭도 그 현재적 표현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5배 넓힌 단둥 항미원조기념관, 미·중 갈등 속 재개관

항미원조기념관에 북한 김일성과 마오쩌둥이 악수하는 사진이 걸려있다. [항미원조기념관 웹사이트 캡처]

항미원조기념관에 북한 김일성과 마오쩌둥이 악수하는 사진이 걸려있다. [항미원조기념관 웹사이트 캡처]

1950년 10월 19일 중국 인민지원군이 단둥(丹東, 당시는 안둥·安東)에서 압록강 철교를 건너 북한 땅으로 진입했다. 중국에서 유일한 항미원조운동 전문 기념관이 1958년 단둥에 설립된 까닭이다. 지난 2014년 6월부터 보수공사에 들어간 기념관은 지난달 19일 참전 70주년을 앞두고 나날이 첨예해지는 미·중 갈등에 때맞춰 새롭게 개관했다.

기념관의 면적은 이전의 5배인 18만2000㎡로 커졌다. 관람 루트의 길이가 1389m에 이른다. 총 6개 관람 구역과 중국과 관련된 한국전쟁의 주요 장면 여덟 개를 재현한 전시장을 갖췄다. 기념관은 중국의 항미원조 전쟁 및 운동 관련 유물 약 2만 건, 관련 자료 약 3만 건을 소장하고 있다. 중국에서 관련 유물과 자료가 가장 온전하게 갖추어진 곳이라고 한다.

기념관과 기념탑 사이 광장에는 수십 ㎝가 움푹 팬, 약 650㎡ 면적의 지원군 지휘소 유적이 자리한다. 3개 출입구와 12개 방을 갖춘 강철 구조의 지휘소는 북한 파견 부대 지휘 기관이 고위 지휘관의 안전을 보증하기 위한 목적으로 현 위치에 만들었다. 하지만 지원군 지휘기구가 부대를 따라 이동하면서 이곳은 후방 예비지휘소와 압록강 수비 고사포 부대가 사용했다.

오는 25일은 항미원조 70주년 기념일이다. 시진핑 주석을 핵심으로 하는 중공 수뇌부가 이날을 어떻게 기념할지 주목된다.

◆이원준

서울대 문학박사. 주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후 시기의 역사를 연구한다. 저서로는 『근대 중국의 토지 소유권과 사회 관행』과 『도시로 읽는 현대 중국 1: 사회주의 시기』(공저) 등이 있다.

이원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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