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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방산비리에…北 화생방 공격때 8만명 맨몸으로 싸운다

중앙일보

입력

전 장병의 16% 정도가 북한이 화생방 공격을 감행할 경우 적절한 보호장구 없이 싸울 수밖에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신형 화생방 보호의 사업이 기술 부족과 방산 비리 때문에 전면 재검토에 들어가면서다. 또 보관 중인 구형 화생방 보호의는 점점 낡아지면서 제대로 기능할지 의심스럽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15만벌 부족, 최대 8만명 입을 보호의 없어 #기술 부족과 방산비리 땜에 신규사업 중단 #군 당국, 버려야 할 제품도 보관 '꼼수'도

화생방 방호의과 방독면 차림의 한국군(왼쪽)과 미군(오른쪽)이 방패에 몸을 가리고 있다. 한국군의 화생방 보호의는 미군보다 성능이 떨어지고, 열피로도가 높다. 그래서 신형 화생방 보호의 사업을 벌였지만, 기술력 부족과 방산비리로 도중 무산됐다. [미 육군 제공]

화생방 방호의과 방독면 차림의 한국군(왼쪽)과 미군(오른쪽)이 방패에 몸을 가리고 있다. 한국군의 화생방 보호의는 미군보다 성능이 떨어지고, 열피로도가 높다. 그래서 신형 화생방 보호의 사업을 벌였지만, 기술력 부족과 방산비리로 도중 무산됐다. [미 육군 제공]

18일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군의 화생방 보호의 보유율이 84.1%로 나타났다.현재 화생방 보호의는 필요량보다 15만 벌이나 부족한 상태다. 이대로라면 최대 8만명이 전시에 제대로 된 화생방 보호의를 입지 못한다는 게 홍 의원실의 추산이다.

북한은 세계에서 세번 째로 많은 화학무기를 보유한 국가다. 현재 약 2500~5000t의 화학무기를 저장하고 있으며, 탄저균ㆍ천연두ㆍ페스트 등 다양한 생물무기를 배양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국방백서』).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군 당국은 맡은 임무와 위협 수준에 따라 화생방 보호의를 개인당 1~3벌씩 나눠주고 있다. 화생방 보호의는 화생방 공격 상황에서 방독면과 함께 장병의 생존을 지키는 핵심 무기체계다.

이처럼 화생방 보호의가 모자란 원인은 신규 공급이 끊겼기 때문이다. 육군은 올해부터, 해군·해병대는 2017년부터, 공군은 2016년부터 각각 구형 화생방 보호의를 도입하지 않고 있다. 신형 화생방 보호의 사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구형 화생방 보호의를 사들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화생방 상황에서 갖춰야 할 보호장구. 방독면, 화생방 보호의, 보호 장갑, 보호 장화. [미 공군 제공]

화생방 상황에서 갖춰야 할 보호장구. 방독면, 화생방 보호의, 보호 장갑, 보호 장화. [미 공군 제공]

그런데 정작 신형 화생방 보호의 사업은 추진 도중 무산됐다. 방위사업청은 지난해 11월 ‘기술능력 부족에 따른 요구성능 미충족’을 들며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2017년 두 차례 시험평가에서 성능이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신형 화생방 보호의 사업이 고꾸라진 것은 기술력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질적인 방산비리도 있었다. 홍 의원은 “신형 화생방 보호의 개발업체가 방사청 등을 대상으로 로비를 벌여 자사에 유리하도록 시험평가 기준을 바꿨다”며 “그나마 요구성능을 낮춘 시험평가마저 통과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개발업체로부터 금품과 향응을 받은 방사청 담당자는 파면과 함께 뇌물수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 밖에 합동참모본부와 국방연구소 관련자에게도 징계가 내려졌다.

현재 보관 중인 구형 화생방 보호의는 계속 낡아가고 있다. 화생방 보호의의 저장 수명은 5년이다. 검사를 거쳐 합격하면 3년 더 늘릴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저장 수명을 연장하면서 5년이 넘은 화생방 보호의는 전체의 66.6%였다. 해병대의 경우 저장 화생방 보호의의 48.1%가 20~30년 된 것들이었다.

지난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북한군이 방독면을 쓰고 화생방 보호의를 입은 상태에서 행진하고 있다. 북한은 대규모 화생방전을 벌일 능력을 갖추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지난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북한군이 방독면을 쓰고 화생방 보호의를 입은 상태에서 행진하고 있다. 북한은 대규모 화생방전을 벌일 능력을 갖추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구형 화생방 보호의를 더 안 사고, 신형 화생방 보호의 사업이 멈췄는데도 매년 많은 물량이 버려지자 국방부는 ‘꼼수’를 썼다. 검사에서 불합격한 화생방 보호의도 “신
품 보급 시까지 창고 내 별도 분리하여 관리하되, 합격품과 동일하게 관리한다”(국방부 ‘2019년 저장 화생방장비ㆍ물자 신뢰성 평가(CSRP) 결과 및 후속 조치 계획’)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유사시 활용’할 목적에서라고 한다. 결국 누군가는 불합격 폐기품을 입어야 한다는 뜻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군 당국은 새 화생방 보호의 사업을 다음 달 시작한다. 절차가 순조롭게 끝난다 하더라도 2026년이 돼서야 군은 새 화생방 보호의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홍 의원은 “화생방 위협이 커지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보호장구조차 확보하는 데 실패한 군은 직무유기를 한 것”이라며  “방산비리와 부실한 사업관리가 국방에 얼마나 치명적 결과를 불러오는지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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