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90년대생 고아성·이솜·박혜수, 90년대 페놀사건 파헤친 말단직원들로 뭉쳤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1995년이 4살(세는 나이) 때여서 처음엔 하나도 기억이 안 났어요. 근데 영화 촬영 전 분장‧의상을 한꺼번에 갖추고 거울을 보는데 자료화면이 아니라 제가 봤던 사람이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옛날에 할머니댁 갔을 때 퇴근하고 돌아온 저희 이모, 당시에 본 일하는 여성들에 대한 무수한 잔상이 제 머릿속에 있다는 걸 깨닫고 뭉클해졌어요. 이모가 당시 대기업 말단사원이었고 비슷한 상황에 있었거든요. 당시를 기억하는 분들, 직접 겪은 분들이 많을 거란 생각에 잘 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꼈죠.”

21일 개봉하는 영화 ‘삼진그룹영어토익반’에서 이솜(30)‧박혜수(26)와 나란히 주연으로 호흡 맞춘 고아성(28)의 말이다. 영화의 무대는 1995년 허구의 대기업 전자회사 삼진그룹. 3개월 안에 토익 600점만 넘기면 대리로 승진시켜준다는 공고가 나오고, 상고 출신 말단 여직원들은 사내 영어 토익반에 모여든다. 그러던 어느 날 입사 8년차 자영(고아성)은 공장에 잔심부름을 갔다가 유독성 폐수 불법 방류 현장을 목격한다. 동기 유나(이솜), 보람(박혜수)과 함께 증거를 찾아 나선 그는 회사가 감춰온 더 큰 비리를 맞닥뜨린다. 고구마 캐다 무령왕릉 발견한 식의 소동극이 좌충우돌 경쾌하게 그려진다.

95년 그린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90년대생 주연배우 고아성·이솜·박혜수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실제 90년대 글로벌화 시기 모 기업의 사내 토익반 강사로 일했던 홍수영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살려 초고를 썼고 여기에 이종필 감독이 90년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페놀 유출 사건을 허구의 설정에 버무려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세 주인공이다. 불의에 맞선 약자에 관한 영화는 많았어도, 그 주체가 이번처럼 20대 여성들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싶다(극중 자영의 나이는 27살). 독립영화도 아닌, 총제작비 79억원의 상업영화로선 드문 시도다. 영화 ‘괴물’ ‘설국열차’의 고아성, ‘소공녀’로 주연급 연기력을 인정받은 이솜, ‘K팝스타’ 출신으로 JTBC 드라마 ‘청춘시대’, 영화 ‘스윙키즈’ 등에서 두각을 드러낸 박혜수였기에 가능했을 터. 개봉 전 만난 배우들도 반색했다.

“이렇게 또래 여성 배우들과 같이 작업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없고 있어도 저에게 올까,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이 작품을 정말 열심히 잘해보고 싶었죠.”(이솜)
“각기 다른 세 여성이 친구로서 힘을 모아 결국 승리해내는 서사가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영화 산업 전반을 생각하면 많이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시기에 연기하고 있는 게 감사하고 소중하죠.”(박혜수)
“촬영할 때 합숙을 자처해서 매일밤 내일 어떻게 찍을지 이야기도 나눴어요.”(고아성)

꼰대 부장 막말에 울컥했죠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직장 경험이 없는 90년대생 배우들에겐 90년대 풍광도 낯설었다. 유니폼을 입고 출근하거나 전 직원이 사내 방송에 맞춰 아침 체조하고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는 장면이 특히 그랬다. 동묘시장, 엄마‧이모 사진을 뒤져 레트로 패션을 발굴하고 눈썹을 뽑아가며 ‘갈매기 눈썹’ 을 매만진 경험이 재미있었다면, 상고 출신 말단 여직원들의 고충은 충격이었단다.
고아성은 영화 초반 자영이 허드렛일 하는 장면을 언급했다. 닦아놓은 구두, 담배 따위를 상사 자리에 놓는 자영의 모습에 누군가가 “그 사람은 왜 지 일을 남한테 시켜” 하는 대사가 우연인 듯 겹쳐지는 장면이다.  “그 장면이 감독님 메시지구나, 딱 알면서 영화를 파악하게 됐다”면서다. 실무능력이 뛰어난 자영은 커피 10잔 12초 만에 타기에 매진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I love myself(나는 나를 사랑한다)”가 입버릇인 ‘걸크러쉬’ 유나는 대졸 사원에게 아이디어를 도둑맞기 일쑤다. 올림피아드 우승자 출신인 보람은 천재적 수학 실력을 가짜 영수증 처리에 쓴다. 박혜수는 “꼰대 부장이 (보람에게) ‘야!’ (막말)하는 걸 들으면서 직장 다니는 내 친구들이 이렇구나 싶어, 되게 울컥했다. 나를 너무 하찮게 여기는 누군가의 눈빛을 느끼는 기분은 시대를 넘나들어 누구나 공감하실 듯하다”고 했다.

이솜 "반대로 산 우리 엄마, 유나에게 담고 싶었죠"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이솜이 연기한 유나가 그나마 할 말은 하며 속을 뚫어주는 캐릭터다. 유나가 사사건건 꼬투리 잡는 상사에게 “니 인생이나 신경 써” 일갈하는 대목을 고아성‧박혜수 모두 명장면으로 꼽았을 정도다. 이솜이 실제 자신의 어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 속 목폴라 티에 금목걸이, 가죽 치마 패션을 그대로 구해 입었던 것도 “(가정주부로서) 반대의 삶을 살았던 엄마를 그런 유나에게 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단다.
‘회장 빽’ 믿고 사고치는 오 상무(백현진), 돈벌이에 혈안 된 빌리박 사장(데이비드 맥기니스) 등 영화 속에는 ‘어른’이랄 만한 기성세대가 전무하다. 그 속에서 주인공들이 스스로 옳다고 믿는 길을 만들며 성장해나가는 여정이 뭉클하게 그려진다. 고아성은 “코로나19로 모두가 쉽지 않은 시기인데 우리 영화만큼은 즐겁게 보실 수 있을 것 같다. 저도 많이 위로받았다”고 가만히 돌이켰다.

박혜수 "언니들 무한 사랑, 저도 선배 되면…"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극 중 노래방 장면에서 완벽한 칼군무를 선보인 세 배우는 지난 16일 음악 프로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가수 김현철의 95년 곡 ‘왜 그래’를 함께 부르기도 했다. “솜이 언니는 정말 열정적으로 연기하는 사람이에요. 극중 유나처럼 아이디어뱅크죠. 나중에 DVD 만들면 영화에 안 담긴 이솜 배우 애드리브 헌정 부분을 만들어야 할 정도로요. 혜수는 어떻게 이렇게 단단하면서도 겸손할 수 있을까 신기할 정도예요.” 고아성의 말이다. 그와 예전에 같은 소속사에 있었다는 이솜은 “이번에 제가 나이로 큰언니란 걸 알고 어떻게 잘 해주지 고민했는데 동생들이 더 어른스러웠다. 아성씨 작품을 거의 다 봤는데 감성이 정말 좋은 배우라고 생각했다. 어른스러우면서도 소녀다운 사랑스러움이 있다”고 했다. 막내 박혜수는 “아성 언니는 여유와 흐트러짐 없는 집중력이 멋있고, 솜 언니는 항상 치열하게 고민해온다”고 자랑했다. “경력차가 큰 선배님들이라 어렵지 않을까 했는데, 신기하게도 첫 대면부터 이 언니들이 저에게 이미 마음을 열 준비가 돼 있는 게 느껴졌어요. 고민을 얘기하면 진짜 내 일처럼 고민해줘요. 무한의 사랑을 받아서 나중에 저도 언니들 같은 위치에 가면 꼭 보듬어주는 선배가 돼야지 다짐하고 있습니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관련기사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