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실미도 50년] 실미도 '무장공비' 둔갑시킨 軍, 서류 불 태우며 "입 다물어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국민을 기만해 35년간 실미도 공작원을 사형수 등 범죄인으로 오인하게 했다.”

1971년 8월 23일. ‘실미도 부대(공군 2325전대 209파견대)’ 공작원 24명의 탈출이 시작됐다. 1968년 5월 실미도 부대에 입교해 지옥훈련에 시달린 지 3년 4개월 만이다. 공작원들은 이날 아침 점호 직후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소총과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채 서울로 향했다. “6개월만 훈련하고 김일성 모가지를 따면 장교로 임관시켜준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왜 4년이 되어가도록 훈련만 시키는 겁니까.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들이 탈출을 감행한 이유다. 서울로 향한 건 국민과 ‘높으신 분’들께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그날의 총성을 찾아…실미도 50년⑬]총격전 후 7개월만에 사형 집행

죽음으로 3년 4개월 만의 지옥 탈출

공작원들의 탈출은 실패했다. 그들은 실미도를 벗어나 인천의 여객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갔다. 하지만 서울 동작구 대방동 유한양행 근처에서 군과 경찰에 막혔고, 공작원들은 총격전 끝에 버스 안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했다. 이들의 탈출 과정에서 공작원 20명을 비롯해 기간병 18명, 경찰 2명, 민간인 6명 등 46명이 숨졌다. (실미도②『시민 탄 버스에서 총격전···결국 수류탄 터트린 실미도 그들』)

실미도 부대 공작원들이 수류탄 자폭을 한 직후 현장. 중앙포토

실미도 부대 공작원들이 수류탄 자폭을 한 직후 현장. 중앙포토

한낮의 서울 도심 총격전은 국민이나 정부에게 충격이었다. 정부는 사건 직후 실미도 부대의 존재를 부정한다. 국방부는 그날 오후 3시쯤 대간첩대책본부를 통해 “무장공비들이 서울에 침투했다”고 발표했다. 3시간쯤 후 정래혁 국방부 장관은 “공군 관리하에 있던 특수범들이 탈출하여 난동하였다”고 정정했다. 군사편찬연구소의『국방편년사(1971~1975)』는 1971년 8월 23일의 사건을 최종적으로 특수병의 난동으로 기록했다. 정부는 또 물밑에서 실미도 공작원들을 ‘사형수 집단’ ‘무기수 집단’으로 내몰았다. 모두 거짓이었다. 공작원들은 민간인 신분이었고, 일부 전과자가 섞여 있었지만, 체육관을 다니거나 행상 등을 하던 젊은 청년이었다.

“정부 당국자 간에 발표내용이 다르고 끝까지 국민을 속이려 들었다…무장공비도 아닌 자기 나라의 특공결사대에 의해 수도 서울이 대낮에 난장판이 되고….”(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회고록 『혁명과 우상3』 中)

“국민을 기만하여 35년 동안 실미도 공작원들이 사형수 등 범죄자인 것으로 오인하게 하였다.”(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실미도사건 진상보고서』)

실미도 서류 불태우고…생존자엔 “입 다물라”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사건을 조작해 발표하는 사이 실미도에서는 부대 관련 서류를 소각했다. 실미도 부대에서 살아남은 김모 소대장과 상급 부대(공군 2325전대)의 최모 대위가 서류 뭉치를 불태웠다. 이때 소각되지 않은 서류는 국군정보사령부에 넘겨졌고, 1997년 가을 보안 감사를 앞두고 이모 소령이 소각했다.

버스 안에서 생존한 공작원 4명에 대해서는 조직적인 회유와 협박을 가했다. 실미도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윗선’의 지시를 받은 김모 기간병이 공작원 4명을 만나 “조사가 들어오면 입을 다물고, 나와 같이 월남(미국과 전쟁 중이던 베트남)에 가자”고 회유했다. 또 김 모 전 실미도 부대 파견대장은 생존 공작원에게 “실미도에서 잘 먹고 잘 있었다고 대답하라, 그러면 살려준다”고 강요했다.

생존 공작원들은 그러나 실미도 생활을 낱낱이 증언했다. 하지만 이들의 증언은 공군 수사당국의 ‘축소 수사’로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당국은 실미도 안에서 기간병들이 공작원들끼리 동료 대여섯 명을 때려죽이도록 하거나, 공작원들의 실미도 탈출 과정에서 기간병·경찰·민간인 등이 숨진 경위조차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서울 대방동의 사건 현장. 중앙포토

서울 대방동의 사건 현장. 중앙포토

7개월 만에 사형 집행…50년째 매장지도 숨겨

공군본부 검찰부는 생존 공작원 4명에 대해 초병 한 명을 살해한 혐의만으로 군사 재판에 넘겼다. 이 과정에서 공작원 4명을 사건 직후부터 구속했지만, 가족에게 알리지도 변호사 선임권을 고지하지도 않았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는 당시 이런 축소수사로 사건의 진상이 은폐됐고, 공작원들은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마지막까지 침해당했다고 지적했다. 군사 법원은 1심과 2심 모두 공작원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공작원 4명은 모두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았다.

실미도 부대의 관리 책임이 있는 군 측에선 4명이 직무유기 혐의로 기소됐을 뿐이다. 김모 공군 2325전대장(대령)이 가장 높은 직책이었고, 그나마 이모 2325전대 공작과장과 최모 2325전대 첩보통신소장 등 2명은 1심 진행 중 공소 취소 처분을 받았다. 결국 김 2325전대장과 한모 실미도 부대장 등 2명에 대해서만 재판이 진행됐고, 이들은 각각 선고유예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실미도 부대 창설을 주도하고 관리한 중앙정보부 관계자들은 수사 선상에 오르지도 언급되지도 않았다.

1972년 3월 10일. 서울 구로구 오류동의 공군 2325전대 안에서 공작원 4명의 사형이 비밀리에 집행됐다. 서울 총격전 발생 7개월 만에 수사, 재판에 이어 사형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시신은 암매장됐다. 군 당국은 이후 암매장지에 대해 침묵했다. 5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유족들은 유골은커녕 암매장지조차 찾지 못했다. 군 당국은 2005년 처음 유해 발굴을 시작했다. 국방부는 “현재로썬 암매장지를 벽제로 추정하는데, 수차례에 걸친 발굴로도 못 찾았다. 수해로 떠내려갔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사형당한 4명의 시신은 어디에 묻혀 있을까. 다음 회에 계속.

※본 기사는 국방부의 실미도사건 진상조사보고서와 생존 공작원 4명의 군사재판 기록, 기타 정부 자료, 관련자의 새로운 증언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된 것입니다.

김민중·심석용 기자 kim.minjoong1@joongang.co.kr

〈지난 기사〉
#그날의 총성을 찾아…실미도 50년
https://www.joongang.co.kr/issue/11272
50년 전 울린 총성의 진실은?…마침표 못 찍은 ‘실미도’
시민 탄 버스에서 총격전···결국 수류탄 터트린 실미도 그들
실미도 부대 만든 그 말…“박정희 목 따러 왔다”
실미도 31명은 사형수? 수리공·요리사등 평범한 청년이었다
기관총탄이 발뒤꿈치 박혔다, 지옥문이 열렸다
1년 반 동안의 지옥훈련…北 보복위해 백령도 향한 특수부대
"때려죽인뒤 불태웠다" 훈련병의 처참한 죽음
민가 숨어 소주 마신 죄, 연병장서 몽둥이에 맞아죽었다
"못 참겠다···섬 탈출했다가 걸리면 자폭하자"
집단 성폭행 터지자, 내놓은 대안이 '집단 성매매'
"김일성 목 따야한다며 묘 파헤쳐 해골물 먹였다"
[실미도 50년] “서울 가서 억울함 알리고 자폭” 분노 폭발시킨 그날의 소주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