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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차 믿고 사게 하겠다”vs“빅 플레이어가 매물 싹쓸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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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7호 12면

자동차매매사업조합연합회가 현대·기아차 본사 사옥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뉴시스]

자동차매매사업조합연합회가 현대·기아차 본사 사옥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뉴시스]

현대자동차그룹이 중고차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자동차를 만들어 판매하고 수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판매한 차를 직접 사들여 검사하고 수리해 재판매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현대차는 자동차 ‘판매 주기’에 모두 관여하게 된다. 정부가 현대차와 같은 대기업의 중고차시장 진출에 제동을 걸진 않는 가운데, 시장에선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동시에 나오고 있다. 중고차를 ‘믿고 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지만, 중고차 업계는 일자리를 잃을까 전전긍긍이다.

현대차 진출 선언에 기대·우려 공존 #허위·가짜 매물 판치는 시장에 #소비자 보호 이유로 필요 주장 #허용 땐 대기업 속속 진출 전망 #중소업체 “생존 위협” 강력 반발 #정부, 시장 독점 방지 상생안 요구

#정부는 2013년 ‘중고차 매매업’을 중소기업 적합 업종으로 지정해 대기업의 진출을 제한해왔다. 이에 따라 2000년부터 중고차 거래 플랫폼인 ‘SK엔카’를 운영하던 SK그룹은 사업을 매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초 관련 규정이 일몰됐고, 지난해 11월에는 동반성장위원회가 중소벤처기업부에 대기업의 중고차시장 진출을 허용하자는 의견을 낸 바 있다. 현대차가 중고차시장 진출을 검토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완성차 업체가 웬 중고차냐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중고차시장은 대기업이 군침을 흘릴 만한 곳이다.

중고차는 지난해에만 총 224만대가 거래됐다. 신차가 178만대 팔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차시장의 1.3배 수준의 크기다. 중고차 1대당 평균 거래가격을 1000만원이라고 가정하면, 대략 연간 22조원이 오고가는 것이다. 이는 한국GM과 르노삼성·쌍용차 등 국내 중견 완성차 3사의 지난해 총 매출액(16조7578억원)보다 많다. 이 때문에 정부가 대기업의 중고차시장 진출을 허용하면 현대차뿐만 아니라 중견 완성차 3사와 SK엔카를 잃었던 SK그룹 등도 뛰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6000여 개 중소 업체로 이뤄진 중고차시장에 ‘빅 플레이어’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특히 완성차 입장에선 진입만 할 수 있다면 발을 들여 놓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지금도 전국 각지의 신차 판매점이 알짜 중고차를 매입하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신차를 구매하는 소비자의 중고차를 중고차 업체에 연결하고 있지만, 중고차시장에 진출하면 이를 직접 매입해 판매할 수 있다. 게다가 자사 중고차 관리를 통해 잔존가치(신차 가격 대비 중고차 가격 비율)를 높일 수 있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도 최근 ‘인증 중고차’ 제도를 운용하는 수입차의 잔존가치가 국산차보다 더 높다고 주장했다. 잔존가치가 높으면 신차 판매 가격도 덩달아 끌어올릴 수 있다.

이유가 어떻든 빅 플레이어 등장 가능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기대와 우려가 공존한다. 일반 소비자는 중고차도 신차처럼 믿고 사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해 11월 진행한 ‘중고차시장에 대한 소비자 인식 조사’에 따르면 설문 응답자의 76.4%가 중고차시장은 ‘불투명·혼탁·낙후됐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고 유무 등을 소비자가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이를 악용한 매매와 소비자 피해가 적지 않다. ‘정보 비대칭’에서 오는 문제인데, 현대차가 중고차시장에 진출하면 이런 문제가 어느 정도 개선될 것으로 기대한다.

현대차도 중고차시장 진출 이유로 첫손에 ‘소비자 보호’를 꼽는다. 미국과 독일에선 완성차 업체가 직접 중고차의 품질과 서비스를 엄격하게 관리해 경쟁이 활성화했고, 그 결과 전체 중고차시장의 경쟁력과 고객 신뢰도가 높아졌다는 평가다. 중기 적합업종 규제를 받지 않았던 BMW·메르세데스-벤츠·아우디·렉서스 등 국내 수입 자동차 수입·판매사(딜러사)도 이런 방식으로 꽤 효과를 보고 있다.

BMW는 인증 중고차 사업으로 2015년 5200대를 팔았지만, 2017년부터는 매년 1만대 이상을 판매하고 있다. 그만큼 소비자의 신뢰를 끌어냈다는 얘기다. 김필수 대림대 교수는 “해당 차량을 만들거나 판매한 회사의 인증만으로도 소비자에게 적지 않은 신뢰감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독점’에 대한 우려다. 현대차는 이미 국내 신차시장의 70%(기아차 포함)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차의 중고차시장 진출은 중소 매매 업체에겐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현대차가 전국의 판매망과 ‘인증’으로 중고차 매물과 소비자를 싹쓸이하면 중고차 업계는 고사할 가능성이 커진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중고차 매매 업체는 지난해 말 현재 5964곳에 이른다. 이들 업체 직원만 3만8096명이다. 이 때문에 한국자동차매매사업조합연합회는 지난달부터 서울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에서 현대차의 중고차시장 진입에 반대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이 연합회의 곽태훈 회장은 “완성차 업체까지 들어오면 우리는 차를 사 모으지 못해 살아남기 어렵다”며 “다시 생계형 적합업종 지정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키를 쥔 정부는 현대차에 ‘상생’을 요구하고 있다.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국회 국정감사에서 “독점을 방지하면서 상생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고 밝혔다. 현대차도 중기부와 상생 방안을 논의 중이다. 업계에선 해외 시장에서 운영하는 인증 중고차 프로그램을 토대로 보증기간(최대 5년) 내 중고차만 판매할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모습이다. 현대차는 현재 미국·캐나다·유럽 등 주요 해외 시장에서 이런 방식으로 중고차도 판매하고 있다.

그러나 중고차 업계는 5년 미만의 이른바 ‘인기 매물’을 현대차가 독점할 수 있다고 반발한다. 현대차가 일정 품질 기준을 만족하는 자사의 중고차를 선별해 일종의 보증을 서는 ‘인증 중고차’ 방식이 될 가능성도 점친다. 더불어 자사 중고차의 사고·수리 이력 등을 매매 업체에 공개하는 방안도 가능할 것으로 내다본다. 이호근 대덕대 자동차학부 교수는 “완성차나 대기업의 중고차시장 진출은 중고차의 신뢰도를 높이는 데 역할을 하겠지만 진출을 허용한다면 점유율 등을 규제할 장치도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중고차 금융시장도 경쟁, 최대 21% 할부금리 내릴듯

현대차가 중고차시장에 진출하면 중고차 금융시장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생길 것 같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최고 연 20%가 넘는 할부금리도 내려갈 전망이다. 중고차 금융은 대개 캐피털사가 중고차 판매자(딜러)를 거쳐 소비자에게 대출(할부)이나 리스를 해주는 구조로, 매년 성장세다. 여신금융협회에 따르면 중고차 여신 규모는 지난해엔 23조3257억원으로, 2018년보다 2조2000억원가량 증가했다.

하지만 금리가 연 15~18%로 신차에 비해 턱없이 비싸 소비자들의 불만이 컸다. 캐피털사가 사실상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데다 캐피털사가 거래를 중개한 딜러에게 적지 않은 수수료를 떼어주기 때문이다. 지난해 여신금융협회가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할부 금리가 최고 연 21.02%에 달했다. 신용등급 6등급인 사람이 대기업 계열 캐피털사에서 36개월 할부로 중고차를 살 때 기준이다. 할부금이 1000만원이라면 1년에 200만원 이상을 이자로 내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차 등 완성차 업체가 중고차시장에 진입하면 이 같은 할부 금리도 낮아질 전망이다. 지금까지는 딜러와 네트워크를 잘 다져놓은 캐피털사가 전적으로 유리했지만, 완성차 업체가 중고차시장에 뛰어들면 기존의 시중은행은 물론 카드사나 또 다른 캐피털사의 시장 진입 장벽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딜러에게 풀리는 중고차가 줄면서 은행·카드사·캐피털사가 동일 선상에서 다시 출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중은행 등 금융권 입장에서도 중고차 금융시장은 매력적인 수익처다. 지난해엔 신한은행과 KEB하나은행이 중고차 전문 플랫폼과 손을 잡고 중고차 금융시장에 뛰어들었다. KEB하나은행 관계자는 “경제 상황이 불확실한 와중에 합리적인 소비를 중요하게 여기는 트렌드가 맞물리면서 중고차 거래가 활발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완성차 업체가 중고차시장에 진출하면 이런 움직임은 더 가속화할 전망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진입 장벽이 낮아지고 딜러에게 줘야 하는 수수료가 줄어들 전망”이라며 “연 15~18%, 최고 21%에 이르는 금리가 대폭 낮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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