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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격정 롤러코스터 탄 베르테르, 사랑 민낯 보여주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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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라운지] 20돌 뮤지컬 주연 카이·박은석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무대화한 뮤지컬 ‘베르테르’가 초연 20주년을 맞았다. 한국에 상업 뮤지컬 시스템도 갖춰져 있지 않던 2000년 한 대학로 극단에서 탄생한 창작 뮤지컬이 지금까지 꾸준히 공연을 이어온 것은 무척 드문 일이다. 뮤지컬계 최초의 팬클럽 ‘베사모(베르테르를 사랑하는 모임)’가 자발적 모금으로 2003년 재공연을 올리는 등, 오늘날 팬덤 문화의 시초가 된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성악도 출신 ‘베르테르’역 카이 #강한 듯 연약한 두 남자 이야기 #고전의 작품성 덕에 20년 흥행 #국악 전공 ‘알베르트’역 박은석 #시간과 운명의 장난 같은 사랑 #팬과 만나는 ‘랜선퇴근길’ 소중

사실 21세기에 엄청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순수한 청년 베르테르가 약혼자가 있는 롯데를 사랑하게 되어 갈등하다가 세상을 등진다는, 일견 허무한 서사다. 그런데 20주년 기념 공연으로 ‘베르테르’에 처음 합류한 카이(39)와 박은석(34)은 단순한 해석을 단호히 경계했다. 수백 년을 이어온 고전에 담긴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다. 삼각관계 속 각자가 맡은 역할, 베르테르와 알베르트도 복잡한 속사정을 가진 생생한 캐릭터로 해석하고 있었다.

뮤지컬계 첫 팬클럽 ‘베사모’ 유명

5인의 베르테르와 2인의 알베르트 중 한명인 카이(왼쪽)와 박은석은 10가지 조합 중에서 최고의 ‘고막샤워팀’으로 통한다. 김경빈 기자

5인의 베르테르와 2인의 알베르트 중 한명인 카이(왼쪽)와 박은석은 10가지 조합 중에서 최고의 ‘고막샤워팀’으로 통한다. 김경빈 기자

“내 마음은 너무나 힘들지만, 맞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두 남자의 이야기라 생각해요. 강한 만큼 연약하고, 연약한 만큼 강인한 양날의 검을 가진 사람들이죠. 아마 롯데가 없었다면 참 좋은 친구가 됐을 걸요.”(카이) “맞아요. 저도 알베르트가 베르테르와 좋은 친구가 됐을 텐데 아쉽다고 느꼈어요. 누구의 잘못이 아닌 시간과 운명의 장난인 거죠. 롯데도 이해가 가요. 이성 앞에서 우유부단해 지고, 호의를 거절 못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저도 롯데와 비슷한 입장이었던 적도 있거든요.(웃음)”(은석)

소설이 발표된 18세기 후반엔 세상에 없던 인물 유형으로 주목받았던 베르테르가 요즘 사람들 눈에 썩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논란이 있을 수 있기에 더 매력적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베르테르가 그런 선택 안 했으면 어떨까, 그런 생각도 하면서 감정 이입이 더 되는 것 아닌가요. 모든 캐릭터가 너무 살아 있어서 이입이 많이 됐어요. 롯데만 해도 나도 저렇게 미성숙했을 때가 있었지, 하면서 봤죠. 21세기에 사는 제가 오래전의 베르테르와 만나고 있는 거란 생각이 들어요. 그게 고전의 힘이겠죠.”(은석)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없는 일탈 정도로 생각한다면 고전이 거기서 멈춰버리게 될 거예요. 지금과 그때의 사랑의 모습은 결코 다르지 않아요. 오랜 세월 숭고하게 빛나고 있는 작품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받아들인다면 더욱 오랫동안 살아 숨 쉴 거라 생각합니다.”(카이)

창작뮤지컬로 드물게 20년간 사랑받은 저력도 다름 아닌 ‘베르테르’ 자체에 있단다. 발가벗은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수많은 선배 배우들의 능력도 있을 테고, 연출력과 음악의 힘이 다 있겠지만, 모든 흥행의 이유는 결국 작품성 아닐까요. 작품이 오랫동안 살아 숨 쉰다는 것은 배우로서나 팬으로서나 감사한 일이고, 특히나 사랑이야기가 점점 사라져가는 시점에 20년 동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탄할 만하다고 봅니다.”(카이) “우리 민낯을 솔직하게 그려내서 그런 것 같아요. 사랑이라는 건 항상 우리에게 필요한 건데 그 극단을 보여주는 무대인 거죠. 20년간  관객과 소통하면서 단단한 사랑을 쌓아온 작품이란 얘기니, 혹시나 제가 작품에 누가 되지 않을까 부담도 있었어요. 긴장하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은석)

카이

카이

다섯 명의 베르테르와 두 명의 알베르트의 다양한 조합 중에서도 카이와 박은석은 ‘고막샤워팀’으로 통한다. ‘어나더 레벨’의 고품격 성악 발성으로 귀호강을 시켜주는 카이 못잖게 박은석의 호소력 짙은 창법도 사랑의 방해자인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실력을 뽐낼만한 넘버는 아니고 어려운 노래예요. 음악도 거의 현악기 구성이고, 기대어갈 리듬도 별로 없어서 쉽지 않죠. 구소영 음악감독님이나 동료들이 많이 도와주고 계세요.”(은석) “평생 노래 쪽으로 가방끈이 긴 저 같은 사람은 은석이 같은 배우를 보면 절망을 느껴요. 선천적인 건지 연습 때문인지, 쟤는 어떻게 저런 감각을 익히게 됐을까 부러운 거죠. 저희 음악이 11인조 현악으로만 구성돼 있어서 자극적이고 강렬한 비트에 노래를 의존하거나 음향에 기댈 수 없거든요. 듣는 사람은 편안하겠지만 부르는 사람은 단점이 드러나고 노래를 드라이빙하기 쉽지 않은데, ‘복면가왕’ 판정단으로서 테크닉 면에서나 감정 면에서나 은석이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웃음)”(카이)

오히려 가창력으로 정평이 나 있는 카이는 ‘베르테르’에서 탁월한 연기력과 높은 캐릭터 싱크로율로 호평받고 있다. “형을 여러 작품에서 만나왔는데, 베르테르에 특히 잘 어울려요. 한 인간으로서 이성과 격정 사이 왔다갔다하는 정서의 롤러코스터가 두드러진달까. 격하게 빠지다가도 ‘정신 차려야지’ 하고 이성적 노력을 많이 하는 베르테르인데, 그래서 종반에 무너지는 장면에서 더 와 닿는 것 같아요. 견고한 사람이 감정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걸 지켜보면서 같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느낌이예요.”(은석) “은석이의 알베르트에도 정립되지 않은 이성이 존재하거든요. 이성이란 건 굳어있고 변치 않는 건데, 알베르트의 이성은 굉장히 흔들리는 이성이죠. ‘석베르트’의 매력이라면 그런 것 같아요.”(카이)

박은석

박은석

두 사람은 2014년 뮤지컬 ‘드라큘라’로 처음 만났다. 당시 언더스터디로 첫 주연을 맡았던 박은석이 카이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이후 ‘삼총사’ 등에서 다시 만나며 돈독한 사이가 됐다. “은석이는 드라큘라 때부터 굉장히 안정적이고 믿음 가는 배우였어요. 제 신념으로는 모든 게 약속 안에 있어야 된다 생각하는데, 순간을 즐기며 약속을 지키지 않는 배우도 많거든요. 빈틈없는 틀 안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만끽하는 배우가 은석이인 것 같아요.”(카이) “저야말로 형님 덕을 많이 봅니다. 최근에도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불안한 적이 있었는데, 형이 템포감 있게 끌고 가 줘서 정신 차릴 수 있었죠.”(은석)

각각 성악과 국악을 전공하다 뮤지컬로 전향한 지 갓 10년을 넘긴 두 사람은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굳이 포장하려 하지 않았다. 배우의 삶도 드라마가 아니라 그저 현실일 뿐이란 것이다. “전에 영화배우 윤여정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사람들이 자기 연기 인생을 논하지만, 난 그냥 돈 벌려고 한 거라고, 그게 연기의 원동력이라고요. 10여년 이쪽에서 일해 오면서 멋진 말은 다 골라서 해왔던 것 같은데, 사실상 우리도 직장인과 다를 바 없거든요. 주어진 일 안에서 보람을 찾을 뿐이고, 결국 살아가는 문제죠. 죽기보다 싫은 일도, 화가 치밀고 그만두고 싶은 일도, 모든 게 현실이었어요. 중요한 건 꿈이 있었고, 순간순간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걸 선택해 왔다는 거죠.”(카이) “아직도 ‘뭐해 먹고 살지’라는 현실적인 고민도 하고 ‘나는 왜 사나’라는 생각도 하며 살고 있어요. 질풍노도는 끝나지 않는 것 같아요.”(은석)

배우도 하나의 직업,  모든 게 현실

두 사람은 ‘거리두기’ 때문에 사라진 퇴근길 만남을 아쉬워하는 팬들을 위해 ‘랜선퇴근길’로나마 팬들과 만나고 있다. 코로나 시대 뮤지컬계 트렌드가 된 ‘랜선퇴근길’을 처음 시도한 게 카이란다. “뮤지컬 배우는 데이터가 명확하거든요. 티켓파워에 신경 안 쓴다는 배우도 있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팬들은 저의 노래와 연기를 통해 기쁨을 얻을 권리가 있고 저는 제공할 의무가 있죠. 그게 우리 관계성이라 생각해요. 아무리 좋은 물건을 만들어도 사용하는 사람이 없으면 필요 없잖아요. 첫 팬 미팅에 두 명을 앉혀놓고 시작한 과거를 생각하면 지금의 저를 있게 한 것은 오직 팬이라 생각해요. 아파트를 증여해주는 부모는 없지만, 무대에 설 수 있는 에너지를 증여해주는 팬이 제 자산인 거죠. 팬들의 기쁨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랜선퇴근길’도 그런 활동의 일환이라 생각합니다.”(카이) “손편지 받는 걸 좋아하거든요. 각자의 다양한 삶에 공연을 비추어본 느낌들을 적어 주시는데, 저로 인한 결과라 생각돼서 큰 보람이 되죠. 저한테 꼭 필요한 소중한 재산이란 걸 요즘 부쩍 더 느끼게 되네요.”(은석)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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