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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족·안락의 기억 있는 공간이 고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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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7호 20면

공간과 장소

공간과 장소

공간과 장소
이-푸 투안 지음
윤영호·김미선 옮김
사이

인본주의 지리학의 고전 #애착 등 잣대로 공간·장소 구분 #환경 따라 인간 능력 달라져 #에스키모 기하학 어휘 발달

지리학이라고 하면 흔히 대륙·바다·산·도시를 떠올리지만, 미국 지리학자인 지은이는 공간(Space)과 장소(Place)에 대한 탐구로 본다. 이 둘은 어떻게 다를까. 지은이는 물리적인 공간에 인간이 경험과 가치, 기억을 더하면 비로소 개념적인 장소가 된다고 설명한다. 공간에 인간의 경험적 데이터가 축적돼야 장소가 된다는 이야기다. 지은이는 이런 과정을 연구하는 인본주의 지리학을 창안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겐 공간 철학이 있다. 인간은 광활하고 널찍하며 여유 있는 공간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드넓은 사막의 부시맨은 스스로 원해서 모여 산다. 다른 사람의 살 냄새를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중산층보다 더 빽빽한 거주 공간에 사는 것은 꼭 경제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다. 다른 사람과 가까이서 지내기를 원하는 인간적인 본능 때문이다.

사람은 다른 이들과의 밀착과 접촉, 그리고 끊이지 않는 사람 소리를 단지 견딜 뿐 아니라 심지어 좋아하기까지 한다. 칠레에선 노동자들에게 새 주택단지를 제공했더니 이전에 좁은 집에 살던 때처럼 거실에서 다 함께 모여 지냈다. 오래된 동네의 활기와 느낌에 익숙할 뿐 아니라 중산층이 사는 교외의 넓은 집을 차갑다고 여기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복잡한 해변, 인파가 몰린 록 페스티벌 등에서 서로 통하는 이들과 함께 있을 때 마음과 정신이 확장된다. 공간의 심리학이다.

지은이는 오랫동안 살던 집은 공간을 넘어 장소가 된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욕구를 충족하고 탈 없도록 보살핌을 받았던 따뜻한 양육의 기억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느꼈던 안전함과 안락함을 반추할 수 있는 곳이다. 인간이 집에 애착을 보이는 배경에는 이러한 친밀한 보살핌의 경험과 기억이 자리 잡고 있다.

사막과 같은 척박한 환경도 누군가에게는 애틋함이 느껴지는 고향이다. 페루 이카 지역의 오아시스 풍경. [사진 Diego Delso]

사막과 같은 척박한 환경도 누군가에게는 애틋함이 느껴지는 고향이다. 페루 이카 지역의 오아시스 풍경. [사진 Diego Delso]

고향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태어나고 자란 땅에 대한 경건한 마음이 있어 고향을 ‘삶의 자양분을 제공한 어머니의 품’으로 여긴다. 이런 애틋한 감정 때문에 고향이 다른 문화권으로 넘어가도 감정은 변치 않는다.

지은이는 제1차 세계대전 뒤 오스트리아에서 이탈리아로 주인이 바뀐 남티롤(독일어 사용자 62%, 이탈리아어 사용자 23%)에 주목한다. 1953년 남티롤 연감에는 독일어로 고향을 뜻하는 하이마트(Heimat)를 ‘우리 종족과 인종에게 생명을 부여한 성스러운 대지’ ‘우리가 경험한 풍경’ ‘가족과 도시·마을의 역사로 가득 채워진 곳’으로 표현했다. 여기에서 보듯 고향은 정치나 역사와 무관하게 인간에게 언제 어디서나 ‘고요한 애착’의 대상이라는 게 지은이의 발견이다. 많은 사람이 외부 세계의 부유함과 경이로움에 관심을 두지 않고 고향을 지키거나 그리워하는 이유다.

지은이는 인간 집단끼리 공간적 능력과 지식이 사뭇 다르다는 데 주목한다. 캐나다의 비교문화 심리학자인 존 W 베리는 1966년 북극권의 에스키모와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의 템네 족을 비교했다. 그 결과 생활환경이 현저히 다른 두 집단이 공간적 지식에서도 큰 격차를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에스키모는 광범위한 공간적·기하학적 어휘를 지닌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지리적 세계를 명확하게 표현한다. 음산하고 황량한 북극의 환경 속에서 눈과 얼음 사이의 균열, 공기 속 소금기 여부 등 자연의 미세한 차이를 바탕으로 길을 찾고 여행을 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수렵인인 에스키모에게 이동하며 공간을 제어하는 기술은 곧 생존 능력이다.

반면 온통 관목과 다른 식물로 뒤덮인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템네 족에겐 그런 소질이 없다. 벼농사를 짓는 이들은 결속력 강한 집단에서 적응하는 능력이 곧 생존 능력이다. 집단생활을 하며 벼농사를 짓는 이들에겐 에스키모처럼 공간을 조직하고 통제할 필요가 별로 없었다.

태평양 섬 주민들은 나침반이나 해도 없이 멀리 떨어진 다른 섬을 찾아가는 지리적 지식과 기술을 보여준다. 18세기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을 뉴질랜드로 안내한 타히티 섬 사람 투파이아는 광활한 바다에 대한 지리적 지식을 갖췄다. 그는 9600㎞가 떨어진 곳에서도 고향을 찾아갔다.

지은이는 에스키모도, 태평양 섬 주민도 식량 확보를 위해선 방대한 지역의 땅과 바다에 대해 알아야 했기에 공간적 지식과 능력을 길렀을 것으로 분석한다. 인간은 환경 속에서 생존능력을 길러왔으며, 그곳에 대한 경험을 집단·후손과 공유해왔다. 인간이 지구라는 공간을 개척해온 지혜다.

지은이 이-푸 투안(중국어 돤이푸·段義孚·90)은 중국 톈진(天津)에서 태어나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공부했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네소타대와 매디슨 위스콘신대에서 가르쳐왔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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