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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역 15년인데...태국 왕비 향해 손가락 세개 든 시위대,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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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세금, 내 세금(My tax money! My tax money!)"  

왕 재산 46조 … 비행기 38대, 545캐럿 다이아도 #“내 세금 쓰지마” … 왕실에 반기, 민주화 시위 벌여 #코로나로 관광산업 타격 태국, 수백만 일자리 잃어 #‘5인 이상 집회 금지’ 긴급 조치에도 시위 계속돼

14일(현지시간) 태국 방콕 거리에서 마하 와치랄롱꼰(67) 태국 국왕의 부인 수티다(41) 왕비가 탄 차량이 지나가자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대는 이렇게 외치며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였다. 영화 '헝거 게임'에 등장한 저항의 제스처에서 따온 것으로, 태국 왕실에 대한 반감을 표현한 것이다.  

14일 태국 전통 복장을 한 민주화 시위 참가자들이 태국 왕실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이고 있다. 영화 '헝거 게임'에서 따온 이 제스처는 이번 민주화 시위의 상징이 됐다. [AFP=연합뉴스]

14일 태국 전통 복장을 한 민주화 시위 참가자들이 태국 왕실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이고 있다. 영화 '헝거 게임'에서 따온 이 제스처는 이번 민주화 시위의 상징이 됐다. [AFP=연합뉴스]

지난 7월부터 태국에선 젊은 학생들을 주축으로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주목할 점은 정치 개혁으로 시작한 시위대의 요구가 점차 입헌군주주제 개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태국에선 헌법에 따라 왕실을 비판하면 '왕실모독죄'로 최장 15년형에 처해진다. 이에 그간 태국 사회에선 노골적이고 공개적으로 왕실을 비판하기는 어려웠다.  

마하 와치랄롱꼰 태국 국왕과 그의 부인 수티다 왕비. [AP=연합뉴스]

마하 와치랄롱꼰 태국 국왕과 그의 부인 수티다 왕비. [AP=연합뉴스]

하지만 한번 불붙은 왕실 비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시위대는 세금이 투입되는 왕실 예산 축소, 왕의 개인 재산과 왕실 재산 분리 등 10가지 조항이 담긴 왕실 개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야당도 공개적으로 왕실 개혁을 촉구하는 한편, 태국 소셜미디어(SNS) 상에는 "왕은 왜 존재하는가" "왕은 나쁘다"란 글까지 올라오고 있다. 

14일 태국 민주화 시위대가 왕실에 저항하는 의미로 손가락 세 개를 들어보이고 있다. 이 제스처는 이번 민주화 시위의 상징처럼 됐다. [AP=연합뉴스]

14일 태국 민주화 시위대가 왕실에 저항하는 의미로 손가락 세 개를 들어보이고 있다. 이 제스처는 이번 민주화 시위의 상징처럼 됐다. [AP=연합뉴스]

와치랄롱꼰 국왕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군주'로 꼽히면서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어려워진 민생을 돌보지 않는다는 분노가 배경이 됐다는 분석이다. 왕실을 향한 국민의 저항 열기가 뜨거워지자 15일 태국 정부는 5인 이상 집회를 금지하는 등 '긴급 조치'를 발표했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 왕' … 545캐럿 다이아몬드, 비행기 38대  

14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와치랄롱꼰 국왕이 보유한 자산은 400억달러(약 45조7200억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마하 와치랄롱꼰 태국 국왕. [AP=연합뉴스]

마하 와치랄롱꼰 태국 국왕. [AP=연합뉴스]

지난해 7월 미국 비즈니스 인사이더가 보도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왕족' 순위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당시 매체는 그의 재산을 300억 달러(약 34조2900억원)로 추정했는데, '석유 부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의 자산(180억 달러, 약 20조5000억원)보다 120억 달러나 많았다.  

80년 넘게 태국 왕실 자산을 관리해온 태국왕실자산국(CPB)은 태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은행 중 하나인 시암은행과 시암시멘트그룹의 대주주이기도 하다. 그런데 와치랄롱꼰 국왕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2016년 즉위한 지 2년이 지난 2018년 CPB는 "모든 왕실 자산을 국왕에게 양도해 국왕의 재량에 따라 관리될 수 있게 한다"고 발표했다. 이전까지 CPB가 형식적으로나마 왕실 자산을 관리해 왔으나, 2018년 이후엔 아무런 견제 없이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14일 태국 방콕 거리를 가득 메운 민주화 시위대. 약 2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AFP=연합뉴스]

14일 태국 방콕 거리를 가득 메운 민주화 시위대. 약 2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AFP=연합뉴스]

FT는 그간의 침묵을 깨고 태국 국민이 이런 막대한 국왕의 재산과 왕실이 쓰는 공공 예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타마라 로스 미국 코넬대 교수는 "(태국에서) 왕의 재정 상황에 관해 시위대의 요구가 나오는 건 전례가 없던 일"이라고 평했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지자 와치랄롱꼰 국왕은 수티다 왕비 등 가족과 함께 독일로 떠나 수 개 월간 호화로운 휴가를 즐기다 태국으로 돌아왔다. 관광 수입 의존도가 높았던 태국 경제는 그 사이 코로나19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수백 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8%로 추락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와치랄롱꼰 태국 국왕이 '국왕의 배우자'란 호칭을 부여받은 시니낫 웡와치라파크(35)와 함께 찍은 사진. 시니낫은 '왕비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난해 왕실에서 쫓겨났다가 지난 9월 와치랄롱꼰 국왕에 의해 권한이 회복돼 왕실로 돌아왔다. [AFP=연합뉴스]

와치랄롱꼰 태국 국왕이 '국왕의 배우자'란 호칭을 부여받은 시니낫 웡와치라파크(35)와 함께 찍은 사진. 시니낫은 '왕비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난해 왕실에서 쫓겨났다가 지난 9월 와치랄롱꼰 국왕에 의해 권한이 회복돼 왕실로 돌아왔다. [AFP=연합뉴스]

상황이 이런데도 올해 왕실 예산은 2018년의 두 배인 90억바트(약 3300억원)에 달한다. 야당이 왕실 지출을 조사한 결과 비행기 애호가인 와치랄롱꼰 국왕은 항공기·헬리콥터를 38대나 소유하고 있었다. 또 비즈니스 인사이더에 따르면 그는 545캐럿이나 되는 다이아몬드도 갖고 있다. 시위대는 태국보다 독일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국왕이 왜 공적 자금을 쓰는지 의문을 갖고 있다고  FT는 전했다.  

태국 청년들 "이 나라는 국민의 것" … "총리 사임"도 요구 

14일 태국의 대규모 민주화 시위는 민주주의 기념탑이 있는 방콕의 랏차담넌 거리에서 약 2만 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이 기념탑은 1932년 절대왕정을 끝내고 입헌군주제 도입 계기를 마련한 무혈 혁명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또 이날은 타놈 끼띠카촌 군부 독재정권(1963~1973년)을 끌어낸 시민혁명 기념일이었다. 시위대는 민주화 역사 현장에서 군주제 개혁과 정치 개혁을 외친 것이다. 

태국 전통 복장을 한 시위 참가자들이 14일 방콕에 있는 민주주의 기념탑 앞에서 세 손가락을 들고 있다. [AP=연합뉴스]

태국 전통 복장을 한 시위 참가자들이 14일 방콕에 있는 민주주의 기념탑 앞에서 세 손가락을 들고 있다. [AP=연합뉴스]

시위대는 2014년 쿠데타로 집권한 쁘라윳 짠오차 총리의 사임도 요구하고 있다. 총리가 야당을 강제 해산하는 등 반대 세력을 탄압해왔다는 이유에서다.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측에선 "그는 독재자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국민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국왕만을 위해 사용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날 시위 현장에 출동한 경찰들은 총리실로 향하는 길목들을 바리케이드로 막았다.  

태국 국민의 공분을 산 '레드불 스캔들'도 이번 민주화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 지난 2012년 방콕 시내에서 세계적인 에너지 음료 레드불 창업주의 손자가 페라리를 타고 과속하다 경찰관을 차로 치어 숨지게 했지만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사건이다. 쌓여있던 기득권층을 향한 분노가 폭발하면서 정부와 왕실을 향해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번졌다는 분석이다.   

15일 경찰 차량 앞에서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이는 시위 참가자. [로이터=연합뉴스]

15일 경찰 차량 앞에서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이는 시위 참가자. [로이터=연합뉴스]

이번 민주화 시위는 10~20대 젊은 학생들이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왕실에 무조건 순응했던 부모 세대와 달리, 왕실 변화를 요구하며 나아가 왕실 존재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시위대는 지난달 19일 왕궁 옆 사남 루엉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인 후 다음 날 광장에 '국민은, 이 나라가 왕실이 아닌 국민의 것임을 선언한다'는 선언이 담긴 놋쇠 명판을 설치하기도 했다. 

정부 "5인 이상 집회 금지" 명령 … 왕실 지지 맞불 집회도 

태국 정부는 시위 열기 진압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15일에는 '5인 이상 집회 금지, 국가 안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보도와 온라인 메시지 금지, 정부청사 등 당국이 지정한 장소 접근 금지' 등의 내용이 담긴 명령을 내렸다. 또 시위 주도자 3명을 포함한 참가자 20여 명을 체포했다.    

15일 태국에서 시위대 해산에 나선 경찰들. [AP=연합뉴스]

15일 태국에서 시위대 해산에 나선 경찰들. [AP=연합뉴스]

정부는 국영방송을 통해 “많은 집단의 사람들이 방콕 시내 불법 집회에 참석했으며 왕실 차량 행렬을 방해하고 국가 안보에 영향을 주는 심각한 행위를 했다”면서 “이런 상황을 효과적으로 종식하고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긴급 조치가 필요했다”고 주장했다.   

또 “국가 안보나 평화, 질서에 영향을 미칠 오해를 빚어내면서 공포를 조장하거나 의도적으로 정보를 왜곡할 수 있는 메시지를 담은 뉴스와 다른 미디어, 전자 정보를 발간하는 것 역시 금지한다"고 밝혔다.  

14일 왕실 지지자들이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맞불 집회를 벌이고 있다. 그 앞에선 민주화 시위 참가자가 왕실을 비판하는 글을 적은 종이를 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14일 왕실 지지자들이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맞불 집회를 벌이고 있다. 그 앞에선 민주화 시위 참가자가 왕실을 비판하는 글을 적은 종이를 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앞서 지난 13일엔 와치랄롱꼰 국왕의 차량 행렬이 지날 예정인 길목에 텐트를 치던 시위 참가자 21명이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14일 민주화 시위 현장에선 왕실 지지자들이 태국 왕실을 상징하는 색상인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민주화 시위를 비판하는 ‘맞불 집회’도 벌였다. 하지만 일각에선 민주화 시위에 대항하기 위해 태국 정부가 경찰을 왕실 지지자들로 위장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태국 정부가 5인 이상 집회를 금지하는 긴급 조치를 내렸지만, 15일 방콕에선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또 열렸다. [로이터=연합뉴스]

태국 정부가 5인 이상 집회를 금지하는 긴급 조치를 내렸지만, 15일 방콕에선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또 열렸다. [로이터=연합뉴스]

정부의 긴급 조치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시위대는 15일에도 시위를 벌였다. 

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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