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김정은의 ‘악어의 눈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정재홍 기자 중앙일보 부데스크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 연설에서 북한 주민들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국제 사회의 대북 제재, 코로나19 방역, 태풍·수해 등 삼중고로 고난을 겪는 주민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제스처다.

김정은 독재가 주민에 고통 초래 #그의 열병식 눈물엔 진정성 없어 #섣부른 감상보다 북 위협 직시해야

문제는 그의 눈물에 진정성이 있느냐이다. 북한 주민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는 이유는 바로 김정은 체제 때문이다. 김정은은 자신과 측근들이 권력을 독점한 채 전 세계에서 유례없는 강압 통치를 하고 있다. 주민들에겐 최소한의 자유나 권리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주민들이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간 보안요원들에게 적발돼 강제수용소에 끌려갈 수 있다. 주민들은 김정은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이자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북한 경제를 옥죄는 대북 제재도 김정은의 권력 유지 욕심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김정은은 체제 유지를 위한 ‘만능의 보검’으로 핵·미사일을 개발했고 국제사회는 이를 막으려고 제재를 한다. 핵·미사일 개발은 주민들을 희생양으로 일인 독재 체제를 영구히 하려는 몸부림이다. 자신이 초래한 주민 고통에 흘린 눈물은 교활한 위정자(爲政者)의 거짓 눈물이다. 악어가 먹이를 먹을 때 눈물을 흘리는 것과 다름없다.

대런 애쓰모글루 MIT 경제학과 교수와 제임스 로빈슨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는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대표적인 실패 국가로 북한을 지목했다. 북한은 1945년 8월 15일 일제에서 벗어났을 때만 해도 남한과 비슷한 조건이었다. 북한이 남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나라가 된 건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75년간 권력 유지에만 집착한 채 주민 삶을 개선하는 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씨 왕조는 주민들의 삶이 나아지면 정권에 위협이 될까 봐 탄압과 감시를 이어왔다.

두 교수는 권력을 독점하는 착취적 정치가 부를 독차지하는 착취적 경제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착취적 정치를 강화하는 악순환을 낳는다고 지적한다. 또 전 세계에서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가 갈린 근본 이유는 정치 체제가 포용적이냐 착취적이냐에 달렸다고 강조한다. 유럽·북미·일본 등 부유한 나라는 포용적 정치체제를, 아프리카·남미·중앙아시아 등 가난한 나라는 착취적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남북한의 경제 격차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지난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 연설 중 울먹이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조선중앙TV 캡처]

지난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 연설 중 울먹이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조선중앙TV 캡처]

김정은이 눈물을 글썽인 이튿날 북한 정부는 경제 분야에서도 성과를 내자며 ‘80일 전투’를 강조했다. 올해 남은 80일 동안 주민을 더욱 쥐어짜 경제를 최대한 끌어올리겠다는 계산이다. 열심히 일해도 혜택이 돌아오지 않은 상황에서 주민 동원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북한의 역대 주민 동원 전투는 성과가 미미했다. 그런데도 김정은 정권이 주민 동원에 나선 까닭은 주민을 착취하는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제 발전을 하려면 주민들에게 정치적·경제적 권한을 확대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정권이 흔들릴 수 있어 김정은은 더욱 정치적·경제적 착취 체제에 매달리고 있다.

김정은의 “사랑하는 남녘의 동포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보낸다”는 발언도 진심이 담겼다고 보기 어렵다. 북한군은 지난달 21일 서해에서 표류하던 한국의 해양수산부 공무원을 피살하고 시신을 불태운 만행을 저질렀다. 김정은이 남녘 동포들의 마음에 공감한다면 진상을 밝히고 사살 지시를 한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 그러나 말로는 사랑한다면서 한국민이 분노하는 만행에 대해선 어떤 책임 있는 조치도 내놓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우리 국민이 피살된 사건에 대해 북한에 제대로 된 조치를 요구하지 않은 채 남북 관계 개선에 목을 매고 있다. 청와대는 김정은의 대남 유화 메시지에 “환경이 조성되는 대로 남북 관계를 복원하자는 북한 입장에 주목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비핵화 진전과 관계없이 종전선언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북한의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북한은 이번 열병식에서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공개하고,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로 추정되는 북극성 4A형, 6연장 초대형 방사포, 북한판 이스칸데르 및 에이태킴스 미사일 등을 선보였다. 한반도 어느 곳이든 정밀하게 타격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대통령의 최우선 과제는 국토 수호와 국민 생명 보호다. 북한이 핵·미사일을 포함한 각종 무기로 한국의 생존을 위협하는데 대화에만 매달리는 건 현실을 외면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의 말보다 북한의 무력을 직시하고 대응해야 한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