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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자동차 회사에서 글로벌 톱 5로…정몽구 시대 저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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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은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일군 현대차그룹을 글로벌 톱5 플레이어로 키운 자동차 산업의 거인이다. 사진 현대자동차그룹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은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일군 현대차그룹을 글로벌 톱5 플레이어로 키운 자동차 산업의 거인이다. 사진 현대자동차그룹

‘변방의 자동차 회사에서 글로벌 톱5로’

정몽구(82)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은 계열 분리 20년 만에 그룹을 아들 정의선(50) 회장에게 넘겼다. 정 명예회장의 승계 의지는 이미 2년 전부터 강했다는 게 재계의 전언이다. 아버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가 노년에 승계 문제를 말끔하게 처리하지 못했던 것을 두고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뜻을 주변에 여러 차례 밝혔다고 한다. 장자(長子)이자 외아들인 정 회장이 경영 능력을 발휘한 점도 선택을 편하게 한 배경이다.

“창업 경영자라 해도 손색 없다”

정 명예회장은 아버지(정주영 회장)와 작은 아버지(정세영 회장)가 일군 한국 자동차 산업을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다. 재계에서 정 명예회장에 대해 “재벌 2세였지만 창업 경영자라 해도 모자람이 없다”고 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1938년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 통천에서 태어난 정 명예회장은 서울 경복고와 한양대 공업경영학과를 거쳐 70년 현대차에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맏형 고(故) 정몽필(1934~1982) 전 인천제철 사장이 일찍부터 아버지를 도운 반면, 정 명예회장은 입사 초기만 해도 경영에 큰 뜻이 없었다.

2006년 기아차 조지아 공장 조인식에 참석한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가운데)과 정의선 회장(왼쪽). 오른쪽은 소니 퍼듀 조지아 주지사. 사진 현대자동차

2006년 기아차 조지아 공장 조인식에 참석한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가운데)과 정의선 회장(왼쪽). 오른쪽은 소니 퍼듀 조지아 주지사. 사진 현대자동차

하지만 현대차 서울사무소에서 부품·자재 관련 업무를 맡고, 4년 뒤 현대자동차서비스㈜ 대표에 오르면서 평생 강조한 ‘품질 경영’의 중요성을 느끼게 된다. 당시 임원이 기억하는 일화는 그가 이에 집착한 이유를 보여준다.

75년 서울 원효료 현대자동차서비스 원효로 공장. 정몽구 당시 사장은 직원들에게 “도요다(일본 도요타)는 보수 부품도 잘 맞는데 왜 우리는 안 되는 거냐”고 질책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직원 가운데 한 명이 겨우 “우리는 아직 보수 부품과 원 부품의 품질 편차가 있다”고 털어놓자, 정 회장은 허탈한 표정으로 돌아서면서 이렇게 말했다. “차를 이렇게 만들면 안 되겠구나.”

96년 그룹 회장에 오른 데 이어 99년 ‘포니 정’ 정세영 회장에게서 현대차 경영권을 넘겨받은 그는 2000년 이른바 ‘왕자의 난’으로 동생 고(故)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과 갈등을 빚는다. 결국 현대차 계열 회사를 분리해 독립했고, 불과 20년 만에 재계 2위의 대규모 기업집단으로 일궈냈다.

정의선(左), 정몽구(右)

정의선(左), 정몽구(右)

글로벌 톱5로 성장한 현대차

분리 당시 계열사 10개, 자산 34조원에 불과했던 현대차그룹은 2019년 현재 계열사 54개, 234조원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2010년엔 미국 포드를 제치고 세계 완성차 판매 5위에 처음 올라 지난해에도 글로벌 톱5의 지위를 지키고 있다.

'품질 경영'과 함께 특유의 '위기 돌파력', 그리고 '장자(長子) 의식'은 정몽구 시대를 대표하는 키워드다. 1980년대 ‘액셀 신화’로 미국 시장에 진출했지만 싸고 품질이 형편없는 차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품질 경영에 박차를 가하면서 2004년 미국 J.D파워 신차 품질조사에선 일본 도요타를 앞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엔 파격적인 ‘10년, 10만 마일 보증’으로 미국 시장에서의 입지를 키웠다.

지난해 5월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의 새 엔진공장 준공식에서 케이 아이비 주지사(왼쪽 다섯번째) 주지사가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사진 현대자동차

지난해 5월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의 새 엔진공장 준공식에서 케이 아이비 주지사(왼쪽 다섯번째) 주지사가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사진 현대자동차

한국 외환위기 당시 무너진 기업 기아차와 한보철강을 인수해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한 점도 정 명예회장의 공이다. 기아차와 한보철강은 ‘제철에서 완성차까지’ 일괄생산 시스템을 갖춘 현대차그룹의 기반이 됐다. 현대건설을 인수하고 선대의 꿈이었던 일관제철소를 건설한 것은 정 명예회장 특유의 ‘장자 의식’ 때문이란 게 재계의 평가다.

현대차가 글로벌 기업 반열에 오르며 정 명예회장도 ▶2004년 비즈니스 위크 최고 경영자상 ▶2005년 오토모티브뉴스 자동차 부문 아시아 최고 CEO ▶2012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세계 100대 최고 경영자상 등을 수상했다. 올해엔 '자동차 명예의 전당(Automotive Hall of Fame)' 헌액 대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소통과 변화, 정의선의 과제

글로벌 10개국에 생산 기지를 건설했지만, 중국 공장에의 과잉투자나 글로벌 합종연횡의 흐름에서 뒤처졌던 점은 결과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결정이었다는 비판도 나온다. 서울 삼성동에 사옥인 ‘글로벌 비즈니스센터(GBC)’ 부지를 매입한 결정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다. 그 대신 미래 차 변혁을 위해 연구·개발(R&D)에 막대한 투자를 해야 했다는 지적이다.

현대차가 앱티브와 자율주행 합작법인 '모셔널' 브랜드를 래핑한 제네시스 G90. 사진 제네시스

현대차가 앱티브와 자율주행 합작법인 '모셔널' 브랜드를 래핑한 제네시스 G90. 사진 제네시스

제철부터 완성차까지 수직 계열화에 집착했지만, 미래 차 환경에서는 모든 기술을 갖출 수 없는 만큼, 글로벌 플레이어와의 협업이나 제휴가 필수적이란 게 전문가의 지적이다. 상명하달식 의사소통 구조가 자리 잡은 것에 대해서도 비슷한 비판이 있다.

하지만 정의선 시대 들어 이런 단점들을 보완하고 있는 것은 희망적인 신호다. 정 회장은 취임 메시지에서도 소통과 조직문화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120년 자동차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변화’를 맞고 있는 시점에서 정 회장의 방향성이 옳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이미 2년 전 아들에게 그룹 회장직을 물려주려 했던 정 명예회장은 지난 7월 대장게실염 등으로 입원한 뒤 3개월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고령인 데다 코로나19로 병원에 계시는 게 좋다는 판단을 내렸고 현재 건강 상태는 좋은 편”이라고 전했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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