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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시시각각

낙태죄, 무엇이 문제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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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논설위원

양성희 논설위원

정부가 낙태죄 존치를 골자로 하는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해 후폭풍이 거세다. 지난해 낙태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른 후속 조치다. 임신 14주 이내의 임신중절은 허용하고, 14~24주에는 기존의 건강·성범죄 등의 사유에 사회경제적 이유를 추가해 조건부로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정부 낙태죄 존치 입법예고 후폭풍 #헌재 ‘헌법불합치’ 결정 의미 훼손 #사문화된 처벌 규정 부활시킨 퇴행

전 기간 낙태를 금지한 현행법보다는 개선됐지만 여성들은 분노하고 있다.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에도 ‘낙태는 범죄’라고 못 박았기 때문이다. “임신 주 수와 허용 사유별로 낙태를 선별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현실과 맞지 않고, 사문화된 낙태 처벌 규정을 부활시킨 역사적 퇴행”(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란 비판이 나온다.

사실 14주까지는 임신인지 제대로 모를 때가 많다. 기간을 넘기기 쉽다는 얘기다. 개정안에 따르면 24주가 넘으면 성폭력이나 장애·미성년 등의 이유로 임신 사실을 늦게 알았거나, 돈이 없어 수술 시기를 놓쳤거나, 심각한 건강상 문제가 있더라도 낙태할 수 없다. 권인숙 의원은 어제 낙태죄를 전면 삭제하는 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안은 국회에서 정부 안과 병합심사를 받게 된다.

물론 낙태죄 존치 여론도 있다. 태아의 생명권을 강조하며 낙태죄 폐지가 성 문란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다. 그러나 태아의 생명권이 산모의 생명권을 앞설 수는 없으며, 모체와 연결돼 있고 전적으로 모체에 의존하는 태아를 분리해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선택권’으로 대립시키는 구도 자체가 문제란 지적도 있다. 태아의 생명이 그토록 소중한데 과거 정부 시책(가족계획)에 따라 공공연히 낙태가 이뤄진 것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인공수정 과정이나 장애·기형 등의 이유로 행해지는 ‘선택적 유산’은?

책 『배틀 그라운드』에 따르면 “현재의 낙태법들은 여성이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여성의 삶에 있어 자기결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19세기 유산”이다. 낙태죄 폐지의 역사가 여성 인권운동의 역사인 이유다. 2018년 낙태죄 헌법소원 대리인 단장인 김수정 변호사는 한 인터뷰에서 “일각에서는 유럽에서도 낙태죄가 유지되거나 임신 후기엔 임신 중지를 못하게 한다며 낙태죄 폐지를 반대하지만, 그건 유럽 법 제도가 종교적 영향을 받은 데다 아주 옛날에 입법됐기 때문”이라며 “우리가 왜 과거의 입법례를 따라 법 개정을 해야 하는가”라고 꼬집었다. 캐나다는 임신 기간과 상관없이 임신 중단을 허용하며, 프랑스는 지난달 하원에서 모든 기간의 임신 중지를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사실 정말 태아를 지키고 싶으면 낙태를 처벌할 것이 아니라 애초에 원치 않는 임신을 줄이는 성교육 등이 필요하다. 상대 남성의 양육 책임회피 때문에 이뤄지는 낙태도 많다. 여성에게 낙태란 자기 몸이 상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하룻밤 즐기고 수술하면 그만’이라는 일은 없다. 설혹 ‘성적인 문란함’에도 반드시 남성 파트너가 있다. 남성은 면책되고 오직 여성·의료인만 처벌받는 법안 자체가 “낙태죄의 목적이 여성이나 태아의 생명권 보호보다 여성의 몸을 통제·처벌하려는 것”(이진송 계간홀로 발행인)임을 보여준다. 낙태를 금하고 성평등 후진국일수록 낙태율이 높은 것도 비슷하다.

정부는 헌재가 못 박은 시한(12월 31일)이 다가올 때까지 한 차례도 공론화 과정을 밟지 않았다. 여성계·의료계와의 소통이 전무했다. 6~7월에 이미 낙태죄 존치라는 청와대 방침이 정해져 있었단 보도도 나왔다. 낙태죄 전면 폐지 입장이던 법무부는 정부 안을 바꾸기 위해 자문기구인 양성평등정책위원회를 통해 ‘임신 중단 전면 비범죄화’ 권고안을 냈으나 그뿐이었다. 이 불통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성이 내 몸을 내 맘대로 할 권리(자기결정권), 사회의 구성 유지에 중요한 생식권(재생산권)·건강권을 보장받기 위해 지난하게 싸워 온 역사를 자칭 페미니스트 대통령께서는 전혀 모르시는 모양이다.

양성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