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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40대 ‘신사’ 이창호 이긴 30대 ‘숙녀’ 이민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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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일러스트 김회룡

일러스트 김회룡

이민진 8단은 만36세의 주부기사다. 초등학교 1학년 딸을 키우며 프로기사 생활을 한다. 2010년 아시안게임 때 국가대표로 출전해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지만 10년 세월이 흐른 지금 이민진은 여자랭킹 17위. 정상권과는 거리가 있다. 그런 이민진이 안조영 9단, 이성재 9단, 유창혁 9단에 이어 이창호 9단마저 꺾고 ‘숙녀팀’ 우승을 확정지었다.

최근 점점 강해지는 여자바둑 #남녀대결의 새로운 균형 필요

여자기사 12명과 40세 이상 남자기사 12명이 맞붙는 지지옥션배. 일명 신사 대 숙녀의 대결. 여기서 신사팀의 마지막 주자로 나선 45세의 이창호에게 백을 쥐고 반집을 이겼다. 7월에 시작된 대회는 지난 6일 이렇게 끝났다. 이 장면을 TV로 보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이창호는 세상에서 제일 강한 기사였다. 시대를 통틀어 사상 최강의 기사가 누구냐고 물을 때도 답은 역시 ‘이창호’였다. 수많은 신수를 만들어낸 전성기의 이창호는 지금의 AI처럼 인간 고수들과 다른 느낌의 바둑을 구사했다. 실수를 하거나 바둑을 지면 오히려 박수를 받기도 했던 이창호, AI처럼 완벽한 계산능력을 지녔던 그에겐 ‘신산(神算)’이란 별호가 따라붙었다.

그 이창호가 이민진에게 패배하는 모습, 그것도 끝내기에서 역전당해 반집을 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만 눈을 감았다. 누구나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그게 승부세계인걸 누가 모른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승부는 시간이 지난 뒤에도 마치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듯 내 가슴을 두드린다. 이민진은 놀랍다. 전투적인 바둑을 구사하는 그는 전부터 단체전에 특히 강했다. 모종의 책임감이 그녀의 강철 심장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 같다. 한편으로 세월은 역시 무적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짠해진다. 이창호를 향한 자연의 섭리는 비정하면서도 오묘하다.

이민진은 직전엔 유창혁(54)을 쓰러뜨렸고 그 앞에선 좀 더 젊은 이성재(43)와 안조영(44)을 꺾었다. 주부기사의 폭풍 질주 앞에 전설들이 추풍낙엽이 됐다. 그 결과 숙녀 팀은 최정(24), 오유진(22), 김채영(24)으로 이어지는 랭킹 1~3위가 출전하지도 않고 우승컵을 가져갔다. 최정 9단과 이창호의 대결이 보고 싶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제동이 걸렸다.

이번 대회까지 숙녀팀은 8번, 신사팀은 6번 우승했다. 겉으론 별 차이가 없다. 한데 여자바둑의 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노벨상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여성 학자들이 수상했다는 소식을 접하며 바둑에서도 여자가 핸디캡 없이 남자를 꺾는 일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남자 최강인 신진서, 박정환은 아직 저 높은 곳에 있지만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신사와 숙녀의 대결이 숙녀의 일방적 우세로 끝나면서 ‘균형’이 생명인 지지옥션배는 장고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처음 신사는 ‘45세 이후’만 출전자격이 있었는데 신사팀의 전력이 달리자 ‘40세’로 전격 낮췄다. 이창호를 조기 투입하여 균형을 잡으려는 의도였다.

올해는 박지연 5단이 5연승 하면서 초반부터 숙녀팀이 앞서나갔다. 안조영이 5연승 하며 균형이 잡히는 듯했으나 이민진이 등장하며 판이 끝나버렸다. 지지옥션배는 대회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2억5천만원) 팬이 많다. 프로기사들도 승부욕을 강하게 느끼는 대회다. 그러나 한쪽으로 너무 기울면 재미가 반감된다. 이 대회를 자식만큼이나 아끼는 지지옥션 강명주 회장은 몇 년 전 ‘신사팀을 40세로 낮추고 이창호를 등판시킨다’는 아이디어를 낸 장본인이다. 그러나 전설 이창호의 효능조차도 계속 이어질 수 없다는 게 드러났다. 여자바둑은 점점 강해지는데 40세 언저리의 남자 프로기사 중엔 특별한 강자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 지지옥션배가 들고나올 카드가 무엇일지 궁금하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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