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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대기업, 우군이 없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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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고현곤 제작총괄 겸 논설실장

고현곤 제작총괄 겸 논설실장

안산에서 중소기업을 하는 Y는 4년 전 기계장비·전기전자에 들어가는 독보적인 연료 기술을 개발했다. 10여년 시행착오를 겪고, 감내하기 힘든 연구비를 투입해 얻은 결실이었다. ‘고생 끝’이라는 생각에 눈물이 절로 났다. 하지만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납품을 타진한 대기업은 성능을 검증한다며 2년을 끌더니 “일단 조금만 써보겠다. 문제가 없으면 차차 늘리겠다”고 했다.

갑을관계와 기술·인력 탈취 여전 #‘기업3법’ 위기에도 국민은 냉랭 #불공정 프레임에 김종인 변수도 #시대가 뭘 요구하는지 돌아봐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기다리자 그 대기업은 다른 제안을 해왔다. 구매를 늘릴 테니 해당 기술의 소유권을 일부 넘겨달라는 것이었다. Y는 ‘이게 말로만 듣던 기술 탈취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했다. 얼마 후 그 대기업은 Y의 핵심 기술인력 3명을 빼갔다.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필자가 고발기사를 쓰자고 했더니 Y는 사색이 됐다. “납품하던 물량마저 끊기는 꼴 보려고 하느냐”고. 우리 기업의 먹이사슬 현주소다.

정부와 여당이 ‘기업 3법’을 밀어붙이고 있다. 대기업은 ‘3%룰’(감사위원 선임 때 최대주주 의결권 3%로 제한)을 도입하면 외국 투기자본의 사냥감이 된다며 비상이다. 전 세계 유례없는 조항이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은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에게 “기업은 생사의 절벽에서 발버둥 치는데, 정치권은 사면초가로 몰아간다”고 읍소했다. 맞는 얘기이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다. 김종인은 “한국 경제에 큰 손실이 오는 법을 만들려는 게 아니다”라고 답했다. 도와줄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김종인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를 보면 ‘대기업은 온갖 로비를 동원해서라도 필요한 것을 쟁취하는 집단’이라는 게 일관된 생각이다. 2016년 민주당 비대위 대표 시절엔 기업 3법과 유사한 법안을 발의했다. 1987년 개헌 때는 훗날 더 유명해진 ‘경제민주화 조항(헌법 119조2항)’을 넣었다. 그는 전두환에게 “머지않아 경제세력이 정치세력을 앞지르고, 자기들 마음대로 나라를 움직이려는 욕심을 갖게될 것이다. 그때 그들을 제어할 헌법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쯤 되면 얄팍한 표 계산으로 기업 3법을 찬성한 게 아니다.

그런 김종인이 이번엔 재계의 숙원사업인 노동법 개정을 들고나왔다. 사람들은 헷갈린다. “도대체 누구 편이냐”. 이는 진영논리에 따라 ‘내편, 네편’으로 가르는 데서 생기는 혼란이다. 김종인은 투명 경영을 위해 기업 3법이 필요하고,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해 노동법도 개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독일 슈뢰더 정부의 2002년 하르츠 개혁처럼, 노동 개혁은 진보정권에서 해야 실현 가능하다는 계산도 깔려있다. 실제로 기업 3법의 독소조항을 보완한 뒤 노동법과 함께 개정한다면 우리 경제에 나쁘지 않다.

대기업은 위기다. 우군이 별로 없다. 일이 터질 때마다 여론전을 하고, 읍소해서 해결할 상황이 아니다. 성장 과정을 되돌아보고,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할 시점이다. 대기업 중심 산업구조가 한계를 드러낸 건 3공 말기인 70년대 말. 경제가 빠르게 커지면서 개발독재로는 자영업자·노동자 등 나라 곳곳에 온기를 퍼뜨릴 수 없게 됐다. 박정희는 그걸 간과했다. 부가가치세를 도입했다가 자영업자의 조세저항을 불렀다. 79년 부마항쟁 시위대가 먼저 공격한 곳이 중부산 세무서다. 노동자의 분노가 일순간에 터져나온 게 같은 해 YH 농성사건이다. 두 사건을 고비로 박정희 정부는 몰락했다.

그 뒤에도 역대 정부는 산업구조를 고치지 못했다. 대기업 집중이 심화됐다.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90년 전후 대기업은 3저 호황으로 번 돈으로 부동산 투기에 나섰다. 부동산값이 요새보다도 더 올랐다. 차입 경영과 문어발 확장의 여파로 97년 외환위기를 맞았다. 부동산 투기와 외환위기의 주원인을 제공한 셈이다. 국민은 불만이 쌓였다. 대기업이 잘못하면 왜 전 국민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대기업 자금이 중소기업으로 흘러가는 낙수효과도 기대만큼 나타나지 않았다. 양극화가 심해졌다. 국민의 불만은 더 커졌다.

이런 민심의 흐름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기업은 달라진 게 별로 없다. 반시장 법안에 반대하면서 그들 스스로 반시장 행태를 보인다. 하청기업과의 갑을 관계가 여전하다. 기술·인력 탈취도 줄지 않았다. 최근에는 네이버·카카오·배민 같은 공룡 플랫폼의 갑질이 추가됐다. 대기업과 귀족노조는 적당히 눈감아주면서 자기들끼리 잘 먹고 잘 사는 ‘노사 카르텔’이 형성돼 있다. 기술벤처처럼 산업의 중간 허리를 맡으며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업이 성장하기 어려운 구조다.

대기업은 왜 고립무원이 됐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보수·진보, 친기업·반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공정·불공정의 문제다. 거친 현대사를 헤쳐나오면서 평등·공정·정의는 시대 정신이 됐다. 진보 정권의 전유물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이를 잘 낚아채 정치적으로 이용했을 뿐이다. 그나마 조국·윤미향·추미애의 탐욕, 위선, 거짓을 감싸는 데 급급해 시대 정신을 내팽개쳤다. 내리막길이 남았고, 실패한 정부로 기억될 것이다.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평등·공정·정의라는 시대 정신을 외면하면 실패한 기업으로 기억될 것이다.

고현곤 제작총괄 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