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언제든 짬만 있다면 여유 있게 영화를 찾아볼 수 있는 유료방송 덕에 늦게나마 ‘기생충’을 보았다. 사실 제목부터 편치 않았기에, 더욱이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굳이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방학 숙제하는 기분으로 TV 앞에 앉았다. 불길한 예감은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예상했던 대로 불편하다. 아니,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몇 달이 지난 지금도 불현듯 떠올라 그렇지않아도 복잡한 머릿속을 헤집는다.
예술적 경험, 정치·사회 이슈를 #삶의 유의미성으로 바꾸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의 권리이자 의무
기생충이 “비열할 수는 있어도 탐욕스럽지는 않다”(서민 기생충학 교수)는데 최소한의 필요와 탐욕의 경계는? 숙주와 기생충의 숙명은? 다양한 계층의 공존을 굳이 기생(寄生)이라는 냉소적 시선으로 바라본 이유는? 이런 일반적 담론 외에 여러 명대사와 공간적 배경, 더 나아가 스쳐 지나가는 소품 하나하나에도 은유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니 이 영화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담은 블로그들이 넘쳐나고, 그 안에서 갑론을박하는 신선한 문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영화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내게 있어 ‘기생충’의 매력, 아니 예술적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극명한 계층 간극이라는 사회적 제재에도 불구하고 봉준호 감독은 구체적 메시지를 자제하고 상징과 은유를 통해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이 점에서 나는 그가 관객을 계몽하거나 설득할 대상이 아니라 생각을 나눌 상대로 존중하는 감독이라고 확신한다. 감상자의 몫을 최대화하는 것, 그것을 예술가가 할 수 있는 감상자에 대한 최대한의 존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기생충’이라는 제목이 주는 부정적 인상으로 인해 아직도 이 영화 감상을 꺼리는 이들이 다수 있을 만큼 예술작품에 있어 제목의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펜데레츠키(K. Penderecki, 1933~2020)의 ‘히로시마의 희생자를 위한 애가(1961)’에 담긴 현악 오케스트라의 끔찍한 불협화와 타악기적 음향은 원폭 피해의 참상을 여실히 드러낸 것처럼 들리지만, 원제목은 엉뚱하게도 연주 시간을 명시한 ‘8분 37초’였다. 이를 히로시마의 원폭 희생자들에게 헌정하기로 하고 제목을 그렇게 바꾼 것은 첫 연주 후 그 전위적 음향이 감상자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제목이 감상자의 느낌과 생각, 더 나아가 자율적 해석을 제한하거나 획일화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드뷔시(C. Debussy, 1862~1918)는 참으로 영리했다. 그의 24곡의 피아노를 위한 전주곡은 각기 상당히 시적인 제목을 갖고 있다. ‘들판에 부는 바람’, ‘눈 위의 발자국’, ‘저녁 노을에 떠도는 소리와 향기’, ‘달빛 쏟아지는 테라스’… 등. 그런데 그 아름다운 제목을 드뷔시는 각 곡의 첫머리가 아니라 마지막 마디 아래쪽에 조그맣게 써넣었다. 제목을 제시하고 당당히 ‘이렇게 들으시오’가 아니라 ‘어떻게 들으셨어요? 저는 이것을 표현한 것이기는 합니다만…’하는 듯 수줍어 보인다. 구체적 표현 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상자를 그에 구속하지 않으려는 겸허한 모습이다.
봉준호 감독이 관객을 존중한 것이나 드뷔시가 감상자를 구속하지 않으려 한 것은 예술적 체험에 있어 주관적 해석의 여지를 키우기 위함이었을 게다. 객관적 해석은 이를 학문적으로 다루는 전문가들 몫이다. 객관적 감상은 감상의 획일화를 의미하고, 획일성은 예술적 체험과 거리가 멀다. 따라서 문학과 예술은 감상자가 무엇이든 느끼고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데 그쳤을 때 그 가치가 빛난다. 반면 우리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할 기회를 빼앗은 채 오직 동의할 것만을 강요하는 작품은 불편함을 넘어 거부감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러니 뻔한 결론이나 어쭙잖은 교훈을 담아 우리를 가르치려 드는 어이없고 오만한 작품은 거들떠보지도 말 일이다. 해석과 결론이 명백한 것은 예술이 아니라 선동적 표어나 포스터와 다름없으니까.
현생인류를 지칭하는 대표적 학명 호모 사피엔스(슬기 사람)는 라틴어로 ‘생각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인간의 본질이 이성적 사고에 있다는 뜻이다.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가 지닌 철학적 의미(내가 생각하고 존재한다는 것만은 의심의 여지 없는 진리다)와는 거리가 멀지만, 철학적 지식이 전혀 없는 내게 이 명구는 글자 그대로 ‘사람은 생각을 통해 존재하고, 그 존재의 가치는 생각의 깊이가 결정한다’로 읽힌다. 예술적 경험이건, 사회적 경험이건, 언론을 통해 접하는 정치·사회적 이슈건, 그 파편적 정보들을 숙고하여 내 삶에 유의미한 그 무엇으로 바꾸는 것은 지적·윤리적 인간으로서 우리의 마땅한 권리이자 의무다.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