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배은희의 색다른 동거(33)
우리 집 아이들은 개성이 뚜렷하다. 첫째 아이는 내향적인 성격이라 골똘히 생각하고, 하나를 깊이 탐구하는 편이다. 여러 친구를 두루두루 사귀기보다는 마음이 맞는 몇몇 친구를 사귀는 걸 좋아한다.
둘째 아이는 외향적이다. 집에 있는 것보다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하고 여러 사람과 잘 어울린다. 엄마처럼 혼자 글 쓰는 일은 외로워서 못할 것 같다고 작가라는 직업은 아예 생각도 안 하겠다고 한다.
위탁가족으로 만난 막내 은지는 수줍음이 많다. 처음 가는 곳, 처음 보는 사람에겐 낯을 많이 가린다.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조물조물 만드는 걸 좋아한다. 40대 중반에 만난 은지를 통해 나도 육아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똑바로 앉아야지!”
“미리 챙겨 놓고.”
“확인했어?”
열정만 앞섰던 초보 엄마 시절엔 잔소리를 해서라도 아이를 잘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원하는 아이로 자라길 바랐고 내가 원하는 열매를 맺길 바랐다. 어쩌면 나의 열등감이었는지도 모른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아이는 씨앗’이라고 생각한다. 가능성을 품고 태어난 ‘온전한 씨앗’ 말이다. 두 아이를 키울 때 알았더라면 좀 달랐을 텐데…. 지금도 그 부분이 아쉽다. 그땐 내 욕구가 앞서 아이들을 세세히 관찰하지 못했다.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시험 기간 며칠 전부터 교과서를 소리 내서 읽게 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서 또박또박 큰소리로 여러 번 읽게 했다. 시험 범위를 다 읽으면, 그 횟수만큼 동그라미에 색칠하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서로 힘 빠지는 일이었다. 아이를 관찰하고 아이에게 맞는 학습법을 찾아야 하는데, 내 입장에서 내 방법으로만 가르친 것이다. 씨앗을 관찰하지는 않고 손에 움켜쥐고, 비비고, 쪼개고, 갈아버렸다.
최숙희 작가의 그림책 ‘너는 어떤 씨앗이니?’는 그런 관점을 잘 보여준다. 바람에 흩날리던 홀씨가 노란 민들레꽃을 피우고, 쪼글쪼글 못생긴 씨앗이 수수꽃다리를 피우고, 꽁꽁 웅크린 씨앗이 모란을 피운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묻는다. “너는 어떤 꽃을 피울래?”
내 뱃속에 작은 씨앗으로 심어진 아이들. 열 달 동안 무럭무럭 자라서 세상에 살아있는 씨앗으로 태어난 아이들. 그 아이들을 각각의 씨앗으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아이들은 꽃을 피울 씨앗이다. 커다랗고 눈에 띄는 꽃이 아니면 어떤가? 아름답지 않은 꽃이 없는데…. 어떤 씨앗인지, 어디에 심어야 하는지, 잘 관찰하고 심고 가꾸면 결국 자기만의 꽃을 피울 것이다. 이걸 깨달은 부모는 한발 짝 뒤로 물러서서 지켜보는 여유도 부릴 수 있다.
물을 주고, 병충해를 막아주면서 아이를 지켜본다면 아이도 행복할 것이다. 더 빨리 자신의 색깔을 찾을 것이다. 이렇게 늦게 깨달은 것이 우리 아이들에겐 내내 미안하지만 내겐 은지라는 또 하나의 씨앗이 있다. 얼마나 다행인가.
위탁가족이 된 지 6년째다. 우리 가족은 모두 문과 성향인데 은지는 이과 성향을 보인다. 움직이는 장난감을 분해하고, 다시 맞추는 걸 좋아한다. 수학 문제집이 재미있다고 잠도 안 자고 더하기 빼기 문제를 푼다.
간혹 은지를 보면서 ‘어떤 꽃을 피울까?’ 즐거운 상상을 한다. 먼 훗날 은지다운 꽃을 피웠을 때 그 향기는 어떨까? 내가 잘 품으면 건강하게 자라 아름다운 꽃을 피우겠지? 살랑살랑 흔들리며 은지만의 향기를 전하겠지?
“은지야 넌 어떤 꽃을 피울래?”
위탁부모·시인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