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감독·작가·배우 뭉친 ‘보건교사 안은영’ “이상해도 괜찮아”

중앙일보

입력 2020.10.12 12:16

업데이트 2020.10.12 12:23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무지개 칼을 들고 학생을 바라보고 있는 안은영(정유미). [사진 넷플릭스]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무지개 칼을 들고 학생을 바라보고 있는 안은영(정유미). [사진 넷플릭스]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드라마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지난달 25일 공개된 넷플릭스 ‘보건교사 안은영’은 주요 제작진이 모두 여성으로 구성돼 있다. 동명 소설 원작자인 정세랑 작가와 드라마에 첫 도전한 이경미 감독, 각각 기획과 제작을 맡은 김현정ㆍ신연주 프로듀서와 키이스트 박성혜 대표가 힘을 합쳤다. 여기에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젤리를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갖춘 주인공 안은영 역을 맡은 배우 정유미까지 완벽한 여성 히어로물의 라인업을 갖췄다.

넷플릭스 공개 후 원작 소설도 베스트셀러
정세랑 작가 “살아있는 욕망서 작품 출발,
무심한 듯 애정어린 교사 영웅처럼 보여”
드라마 첫 도전 ‘미쓰 홍당무’ 이경미 감독
“해외 시청자 의식해 한국적 요소 살렸다”

2010년 환상문학 웹진 ‘거울’에서 사랑해, 젤리피쉬’란 제목으로 실렸던 단편은 2015년 장편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민음사)이 되어 출간됐고, 6부작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선보인 리커버 특별판은 2주째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달리고 있다. 5년간 4만7000부가 팔린 원작은 2달 만에 9만부 가량 팔려 나갔다. 9일 서면으로 만난 정세랑 작가는 “낮에는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고 밤에는 소설을 쓸 때 첫 단편을 쓰면서 투잡으로 힘들어하는 주인공을 떠올리게 됐다”며 “친한 친구들 중 교사가 많아서 영향을 받았다. 무심한 직장인인 것 같지만 학생들에게 애정 있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고 밝혔다.

“섬뜩한 욕망이 사람에게 미칠 영향 상상”

동명 원작 소설을 쓴 정세랑 작가. 드라마 극본 작업에도 참여했다. [사진 넷플릭스]

동명 원작 소설을 쓴 정세랑 작가. 드라마 극본 작업에도 참여했다. [사진 넷플릭스]

안은영은 욕망이 지나간 자리에 진득하게 남은 젤리와 재수 ‘옴’ 붙는다 할 때 옴벌레 등 학생들에게 유해한 것들을 물리치면서 신체 및 정신 건강까지 책임지는 보건교사다. 정 작가는 “어떤 귀신이나 괴물보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글이글한 욕망이 위험할 수 있다고 여겼다”며 “대학 입시나 부동산 이슈처럼 숨어 있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주제들이 있고 체면 아래에 있던 걸 목격하면 섬뜩한 기분이 든다. 그런 욕망이 떨어져나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면 어떨까 상상했다”고 말했다.

안은영이 사용하는 무기로 무지개 칼과 비비탄 총을 설정한 이유는 장난감이 지닌 ‘무해함’ 때문이다. 그는 “안은영이 최대한 다치지 않게 근거리와 원거리 무기가 다 있었으면 했다. 무게가 가볍고 크기가 작아서 직장인 가방에 들어갈 수 있고 고장나도 쉽게 교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르게 됐다”고 설명했다. 고등학교 설립자의 손자인 한문교사 홍인표(남주혁)는 유해 물질로부터 보호막을 가지고 있어서 안은영은 그의 손을 잡고 에너지를 충전한다. 정 작가는 “두 사람은 미성년자를 보호하고 시민으로 빚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는 교사들에게 경의를 바치고 싶어 만든 캐릭터”라며 “보상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세계에 친절한” 히어로라고 덧붙였다.

“아일랜드 출신 남편 보며 외국 취향 이해”

극본과 연출을 맡은 이경미 감독. 드라마는 첫 도전이다. [사진 넷플릭스]

극본과 연출을 맡은 이경미 감독. 드라마는 첫 도전이다. [사진 넷플릭스]

정 작가가 직접 극본을 쓰며 밑그림을 그렸다면, 이경미 감독은 여기에 색을 입히며 각색해 나갔다. 5일 화상으로 만난 이 감독은 “제안을 받고 원작을 읽었는데 내 머릿속으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라 끌렸다”고 밝혔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 스크립터로 시작해 극본을 쓰고 연출한 ‘미쓰 홍당무’(2008), ‘비밀은 없다’(2016) 등으로 주목 받은 이 감독은 “소설의 프리퀄 개념으로 여성 히어로 안은영의 성장드라마에 초점을 맞춰 재구성했다”며 “명랑하게 싸우고 있지만 항상 죽음을 맞닥뜨려야 한다는 점에서 고독한 킬러 이미지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이야기를 발전시켰다. 안은영에게 친구가 필요할 것 같아 추가된 화수(문소리)는 타투이스트에서 침술사로 바뀌었고, 옴잡이 백혜민(송희준)은 은영을 거울처럼 비추는 존재로 거듭났다. 이 감독은 “은영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가두고 있던 틀을 깨트리고 딛고 일어서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다”고 밝혔다. ‘야매’ 침술원과 세계 각국의 부적 등은 아일랜드 출신 남편 피어스 콘란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2018년 결혼한 이 감독은 “수산시장처럼 외국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코드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깊은 역사를 가진 사이비종교도 낯선 사람들에게는 흥미로운 요소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봤다”고 밝혔다.

“영화는 개봉 전 흥행 결정…안타까웠다”

안은영이 한문교사 홍인표(남주혁)의 손을 잡고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다. [사진 넷플릭스]

안은영이 한문교사 홍인표(남주혁)의 손을 잡고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다. [사진 넷플릭스]

장영규 음악감독에게 “한국적 요소를 살려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밴드 이날치의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는 장 감독이 민요와 판소리 등을 접목해 만든 주제가는 “보건 보건 교사다 나를 아느냐 나는 안은영”이라는 중독성 있는 멜로디와 독특한 노랫말로 시청자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이 감독은 “남편 역시 아이들이 옥상으로 달려가는 신에서 흐르는 잔잔한 음악이나 조용한 분위기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국악풍 노래 등 서로 다른 성격이 충돌하는 조합에 특히 열광적으로 반응했다”고 밝혔다. “개봉 전 예매율로 상영 기간이 정해지고 흥행에 실패해 영화제가 아니면 해외 관객과 만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워” 넷플릭스와 협업에 도전한 그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젤리의 구현이다. 이 감독은 “자료 조사를 하다가 인간의 평범한 삶을 위협하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분류하고 관리하는 SPC 재단이란 곳을 알게 됐다. 다양한 형태와 성격으로 분류돼 있어 힌트를 얻었다. 동물 다큐멘터리도 찾아 보면서 희귀한 움직임을 찾아갔다”고 설명했다. 정 작가는 “내 머릿 속의 젤리는 흐물흐물하고 테두리도 불명확한 점액질로 무해하면 투명하고 해로우면 탁해지는 정도였는데 알록달록하게 구현된 젤리를 보면서 역시 영상 일을 하는 분들은 다르구나 싶었다”고 밝혔다. “내가 쓰는 방식이 수채화처럼 겹겹이 얹는 식이라면, 감독님은 유성매직으로 확실한 선을 긋는 듯한 개성이 있어서 독특한 리듬이 생긴 것 같다”고 했다.

“시즌 2 참여하고파…영상·문학 오갈 것”

의료용 더미를 들쳐업고 수업에 가고 있는 모습. 복도에 젤리들이 가득하다. [사진 넷플릭스]

의료용 더미를 들쳐업고 수업에 가고 있는 모습. 복도에 젤리들이 가득하다. [사진 넷플릭스]

다른 사람의 염원이 깃든 곳에서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는 두 사람. [사진 넷플릭스]

다른 사람의 염원이 깃든 곳에서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는 두 사람. [사진 넷플릭스]

특이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서사는 두 사람의 작품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미쓰 홍당무’의 질투와 원망에 휩싸인 러시아어 교사 양미숙(공효진)이나 ‘비밀은 없다’에서 실종된 딸을 찾아 나서는 연홍(손예진)은 작은 것에 집착하며 자신만의 수사를 펼쳐 나간다는 점에서 안은영과 닮았다. 이 감독은 “내 작품 속에 나오는 여자들은 말을 잘 듣는 사람들은 아니다. 사회나 제도가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데서 쾌감을 느끼는데 그런 캐릭터가 너무 없기 때문에 광기의 맥락으로 읽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이어 “이상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나는 그게 너무 이상하다”며 “이상해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한편 정 작가가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은 『피프티 피플』(창비) 이후 4년 만에 내놓은 신작 『시선으로부터,』(문학동네)도 덩달아 화제를 모으고 있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겪고 새로운 삶을 찾아 하와이로 떠난 심시선과 그의 딸과 손녀 등 모계로 이어지는 여성 중심 서사로 지난 6월 출간한 이후 넉 달 만에 11쇄를 찍었다. ‘보건교사 안은영’ 시즌 2 가능성에 대해 정 작가는 “아직 논의된 것은 없지만 제작하게 된다면 꼭 참여하고 싶다”며 “문학계에서는 SF 등 가벼운 문학을 한다고 은근하게 배제되는 편이었는데 영상계에서는 처음부터 두 팔 벌려 환영해줘서 좋았다. 양쪽을 오가며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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