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실미도 50년]“탈출해 서울광장서 억울함 알리고 자폭하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더는 훈련 못 받겠다. 실미도에서 나가겠다.”

1971년 5월 어느 날. 산악 구보 훈련을 받던 정○○ 공작원이 산에서 내려와 식당으로 뛰어들더니 식칼을 집어 들었다. 그는 식사 준비에 한창이던 기간병 목에 흉기를 들이대며 더는 훈련을 받지 않겠다고 소리쳤다. 실미도 부대 입대 당시 약속했던 훈련 기간(6개월)이 2년 반쯤 더 지난 때였다. 동료 공작원들이 모두 달라붙어 정 공작원을 진정시킨 뒤에야 그는 울부짖으며 칼을 내던졌다.

[그날의 총성을 찾아…실미도 50년⑫]D-Day 초읽기

“살길은 실미도 탈출뿐”

실미도 부대에선 하극상이나 탈영 등을 저지른 공작원은 동료를 시켜 죽이는 게 다반사였다. 공작원 3명이 동료의 몽둥이찜질로 숨졌고, 1명은 동료가 휘두른 대검에 의해 죽었다. 이번에도 교육대장이 정 공작원 앞에 대검을 내던졌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지시였다. 한참 생각에 잠겼던 정 공작원은 울음을 터뜨리며 무릎을 꿇었다. “한 번만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죽더라도 북에 가서 김일성 모가지를 따고 죽겠습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교육대장은 대검을 거뒀다. 반기를 든 공작원이 처벌 없이 복귀한 건 처음이었다.

“사건은 그렇게 묵인되었지만, 부대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져만 갔다. 누구나 이 섬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모두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것 같았다.”(양○○ 기간병 회고록)

8월 25일 실미도 야산에서 바라본 해변. 멀리 무의도가 보인다. 우상조 기자

8월 25일 실미도 야산에서 바라본 해변. 멀리 무의도가 보인다. 우상조 기자

부대 심상찮았지만 “기다려라”

실미도 부대의 파견대장·교육대장 등도 부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1970년 하반기부터 상부에 “출구 전략을 마련해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했다. 남북 관계가 개선돼 실미도 부대의 목표였던 북한 침투 공작 필요성이 없어졌다면 부대를 해체하자는 건의였다. 공작원들을 사회로 돌려보내거나 군의 부사관으로 임관시켜달라고도 했다. 일각에서는 “‘인간 병기’로 키운 공작원들을 모두 사살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보고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부대 해체 건의 관련 보고는 공군참모총장을 거쳐 국방부 장관에게까지 올라간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국방부 장관은 특별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은 2006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서 나온 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의 진술이다.

“실미도 부대가 공군 소속이었지만, 공군이 자체적으로 부대를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중앙정보부에서 창설한 부대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공작원들의 신분은 군인도 군무원도 아닌 민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1971년 1월쯤 중정과 협의를 하도록 정래혁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했는데, 장관은 ‘알았다, 연구해 보자’고만 했습니다. 얼마 후 다시 정 장관을 찾아갔지만 ‘선거철이라 바쁘니까 10월까지 기다려라, 그때 가서 해결해주겠다’고 답했습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정 장관은 이후락 중정부장에게 실미도 부대 해체 안 등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이에 대해 정 전 국방부 장관은 “김두만으로부터 실미도 부대 해체 등의 건의를 받은 적 없고, 김두만이 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국가에 속았다” 배신감

중정은 실미도 부대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특별한 대안을 내놓지 않았다. 실미도 부대 교육대장이 공작원들에게 “조금만 더 기다려봐라”라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공작원들은 모든 탄원이 거부당했다고 생각했고, 국가에 대한 배신감이 깊어져 갔다.

1971년 8월 20일. 드디어 실미도에 ‘시한폭탄’이 장착된다. 공작원 8명이 외부에서 구해온 소주를 몰래 마시다 적발돼, 공작원 전체(24명)가 약 40분 동안 집단 구타를 당하는 처벌을 받은 것이다. 이 가혹 행위로 심○○ 공작원이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심 공작원을 옆에 뉘어 놓고 모인 공작원들은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털어놨고, 탈출 논의로 이어졌다. ‘모든 공작원이 실미도를 탈출한 뒤 억울한 사정을 서울의 높은 사람에게 알리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기간병 죽여야 우리가 산다”

“서울 중앙청에 가서 국무총리를 만나 4년 가까이 고생한 내용과 국가에 배신당한 사실을 직접 호소하기로 결심했습니다.”(임○○ 공작원·재판 기록)

“사령부나 청와대에 가서 실미도의 실정을 폭로하려고 했습니다.”(이○○ 공작원·재판 기록)

“중앙청 광장이나 시청 광장에서 휴대하고 있던 총기를 땅에 놓고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폭로하고 후배들에게 그러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당부한 뒤 그 자리에서 자폭하려 했습니다.”(김○○ 공작원·재판 기록)

공작원들이 잡은 D-Day는 1971년 8월 23일 월요일. 눈앞의 무장한 기간병 등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문제였다. 이들이 공작원 24명의 탈출을 눈감아 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려면 기간병을 모두 죽여야 한다.” “죽이지 말고 감금한 뒤 탈출하자.” 공작원들의 고민이 시작됐다. 다음 회에서 계속.

※본 기사는 국방부의 실미도 사건 진상조사(2006년)와 실미도 부대원의 재판 기록, 실미도 부대 관련 정부 자료, 유가족·부대 관련자의 새로운 증언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된 것입니다.

심석용·김민중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지난 기사〉
#그날의 총성을 찾아…실미도 50년
https://www.joongang.co.kr/issue/11272
50년 전 울린 총성의 진실은?…마침표 못 찍은 ‘실미도’
시민 탄 버스에서 총격전···결국 수류탄 터트린 실미도 그들
실미도 부대 만든 그 말…“박정희 목 따러 왔다”
실미도 31명은 사형수? 수리공·요리사등 평범한 청년이었다
기관총탄이 발뒤꿈치 박혔다, 지옥문이 열렸다
1년 반 동안의 지옥훈련…北 보복위해 백령도 향한 특수부대
"때려죽인뒤 불태웠다" 훈련병의 처참한 죽음
민가 숨어 소주 마신 죄, 연병장서 몽둥이에 맞아죽었다
"못 참겠다···섬 탈출했다가 걸리면 자폭하자"
집단 성폭행 터지자, 내놓은 대안이 '집단 성매매'
"김일성 목 따야한다며 묘 파헤쳐 해골물 먹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