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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 판치고 목소리 큰 게 진실…‘인스턴트 세상’ 될 수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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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6호 27면

[미래 Big Questions] 세계관의 미래

앙리 루소, ‘잠자는 집시’(1897). 40대가 넘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루소는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왜 여인이 사막에서 잠들었는지 질문을 한다. [뉴욕 MoMA]

앙리 루소, ‘잠자는 집시’(1897). 40대가 넘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루소는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왜 여인이 사막에서 잠들었는지 질문을 한다. [뉴욕 MoMA]

“인간이란 무엇인가?”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는 “스스로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끝없이 던지는 존재”라고 정의해 유명하다. 덕분에 인간은 필연적으로 형이상학적인 동물이라는 말이겠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정말 궁금해진다.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왜 호모 사피엔스는 어차피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그렇게도 집착하는 걸까?

삶의 의미 무엇? 신 존재하나? #카시러 vs 하이데거 열띤 논쟁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 그림엔 #삶과 죽음 상징·의미로 가득 #공론화 불가능한 사회 공동체 #‘논리·팩트·하나의 진실’ 무의미

에른스트 카시러

에른스트 카시러

1929년 스위스 작은 도시 다보스에서는 고리타분한 이런 철학적 문제를 두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신칸트 철학의 대가인 에른스트 카시러와 당시 가장 ‘힙’했던 ‘젊은’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논쟁이었다. 칸트의 계몽주의 전통을 이끌던 유대인 카시러는 주장한다. 경험 그 자체만이 아닌, 심볼과 기호를 통해 세상에 대한 사유가 가능한 게 인간이기에, 답이 없는 질문 역시 우리는 끝없이 만들어내고 바로 그런 질문을 통해 우리는 꾸준히 계몽한다고. 추후 나치 독재정권과 협력하게 될 하이데거는 반박한다. 아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존재의 시간적 한계가 모든 철학의 시작이자 끝이어야 한다고. 카시러의 논리-언어적 접근으로는 인간의 존재적 두려움을 해결할 수 없다고.

진실, 생존 보장 땐 언제든 왜곡 가능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까? 아니면 이 세상 모든 걸 기호와 상징으로 표현하려는 본능 덕분일까? 40대가 넘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의 작품을 살펴보자. 미술사를 공부한 적도, 관심도 없었던 루소의 손은 단순히 자신의 눈이 만족할 때까지 그렸을 뿐이다. 표현할 의미가 없었기에 숨겨진 기호도 없는 루소의 그림. 하지만 덕분에 역설적으로 그의 작품들은 마음껏 투사 가능한 상징과 의미로 가득하다.

마르틴 하이데거

마르틴 하이데거

여인은 왜 사막 한가운데 잠이 든 걸까? 사자가 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 걸까? 외로운 사막 같은 인생에서 결국 사자 같은 죽음을 마주치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종교일까? 아니면 과학과 철학? 삶에서 길을 안내해 주던 지팡이는 이제 아무 소용없고, 인간에게 허락된 작은 행복을 주던 화려한 옷과 멋진 악기마저도 무의미해 보인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기 시작하는 호모 사피엔스. 덕분에 ‘죽음’은 모든 인간의 시작이자 끝이다. 하지만 시작과 끝 사이엔 언제나 중간이 있고, 비움보다 채움을 선호하는 인간은 보고, 듣고, 만지는 것들로 삶을 채우기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뇌가 머리 안에 있으니 말이다. 세상을 직접 경험할 수 없는 뇌는 두개골이라는 ‘감옥’ 안에 평생 갇힌 ‘죄인’이다. 눈과 코와 귀가 전달한 정보를 통해 세상을 간접적으로 이해하지만, 뇌에 정보를 전달하는 센서들은 완벽하지 않다. 아니, 완벽할 필요조차도 없다. 눈, 코, 귀, 그리고 뇌의 진화적 목표는 진실이 아닌 현실에서의 생존이다. 생존만 보장해 준다면 진실은 언제든지 왜곡 가능하다는 말이다.

개미의 현실과 인간의 현실, 아메바의 세상과 고래의 세상, 모래와 블랙홀의 현실. 유일하게 기호와 심볼을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은 새로운 ‘게임’을 하기 시작한다. 바로 ‘현실 만들기’였다. “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무언가의 존재를 가정한다. 지구 대부분 생명체는현실에 대해 질문을 할 수 없다. 인간과 가장 비슷한 영장류들의 인지 능력은 충분히 토론해볼 수 있겠지만, 우선 먼저 현실이란 필연적으로 인간의 질문을 바탕으로 한다고 가설해보자.

우리는 끝없이 질문들을 던진다. 산과 바다 넘어 세상은 어떤 모습을 가졌는지, 만물을 창조한 전능한 존재가 있었는지, 왜 우리는 죽어야 하는지 말이다. 비슷한 경험은 비슷한 질문과 비슷한 세계관을 가능하게 한다. 빙하시대 매머드를 사냥하던 우리 조상들. 꽁꽁 얼어붙은 손과 발을 녹이며 질문하지 않았을까? 매머드들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왜 불은 따듯하고 얼음은 차가울까? 더는 입에서 김이 나오지 않는 어머니의 몸은 왜 딱딱하게 굳어버린 걸까?

사막에서의 인간은 사막에 최적화한 현실과 세계관을 만들고, 바다로 둘러싼 섬에 정착한 이들은 신이 바닷속에 산다고 믿었다. 정글에서 생존해야 했던 아마존 인디언들은 깊은 밀림 속 재규어를 섬겼고, 가나안에 도착한 히브리인들은 단일 신 야훼를 믿었다. 홀로 태어난 인간은 자신만의 현실을 만들지만, 서로 다른 개개인의 현실들은 가족과 마을의 현실에 합류된다. 주어진 현실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개인의 현실들이 합쳐지고 녹아들어 모두가 동의하고 공유할 수 있는 “현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

움베르토 에코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는 기호학자였다. 특히 중세 철학과 중세 기호학의 대가였던 그는 현대사회와 중세의 가장 큰 차이를 현실에 대한 이해라고 믿었다.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서 대부분 자라고,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다 죽었던 중세인들의 세상은 마을을 넘지 못했다. 인쇄물도, 신문도, 라디오도 없던 시대 그들이 “동기화”해야 할 현실은 지극히 작았다. 그렇다면 반대로 현대화란 시간과 거리 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의 현실과 세계관의 동기화 과정이라고 해석해볼 수 있다. 여행, 매스 미디어, 역사책, 그리고 국가와 정부의 탄생은 마을마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세계관과 현실을 통합하기 시작한다. 마치 동네 작은 식당과 가게가 대형마트와 프랜차이즈로 대체되듯 말이다.

같은 이야기, 같은 역사, 그리고 같은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며 서서히 공통된 목표와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공동체로 발전한 현대 사회. 물론 모든 공동체 멤버들의 역할과 영향력이 동일할 수는 없겠다.

역사상 가장 거대한 ‘공동현실’ 만들어

위르겐 하버마스

위르겐 하버마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하버마스는 그렇기에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는 모두가 동일한 권리를 기반으로 같은 공론장에 참여해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동등한 공동체 멤버들 간의 충분한 논의를 거쳐 얻은 컨센서스가 바로 그 현실 내에서의 ‘진실’이라는 것이다.

20세기 말 우리는 어쩌면 인류역사 상 가장 거대한 ‘공동현실’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평평했기에 제품과 서비스, 그리고 꿈과 아이디어 모두 공유되어 ‘세계화’라는 하나의 거대한 현실로 녹아들어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장 높은 곳은 언제나 가장 깊게 추락하기 전인 걸까? 인터넷과 개인 미디어, SNS 뉴스피드와 추천시스템은 모두가 참여하고 토론하는 공론화를 이제 무의미하게 만들기 시작한다. 더는 우리는 하나의 현실을 향해 가지 않는다. 다양한 경험이 하나의 현실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각자 선호하는 현실과 가장 잘 어울리는 정보만 골라 소비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현실을 논의하지 않는다면, 논리와 팩트는 무의미해지지 않을까? 공론화가 불가능한 공동체에서는 음모론이 판치고, 진실은 가장 목소리 큰 이의 몫이 된다. 롤플레잉 게임과 가상현실을 통해 현실의 다양성을 이미 경험한 인류는 이제 사회 공동체를 다중 현실 중 하나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현실이 여러 개라면, 진실 역시 여러 개다. 모두가 동의하는 하나의 진실과 도덕이 불가능해진 21세기. 현실 그 자체가 더는 절대적이지 않은 미래에서는 어쩌면 모두가 합의한 공동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 대신, 언제든지 쓰고, 믿고, 다시 포기 가능한 ‘인스턴트 현실’의 세상이 될 수도 있다.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자 daeshik@kaist.ac.kr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각각 박사후 과정과 연구원을 거쳤다. 미국 미네소타대 조교수,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냈다. 2013~2015년 중앙SUNDAY에 ‘김대식의 Big Questions’를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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