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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많이 풀려 가치 곤두박질…금융 피난처 지위 ‘흔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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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6호 14면

공급 과잉. 최근 미국 달러화 가치 하락 원인에 대한 시장의 분석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응한 대규모 유동성 공급으로 시장에 달러가 너무 많이 풀렸다는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직후 수직상승하던 달러화 가치는 최근 2년 사이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하락폭도 가파르다. 달러화 가치를 더 떨어뜨릴 요인이 많아 달러 가격이 반 토막 난다거나, 기축통화(基軸通貨·나라 간 거래에서 사용하는 기본이 되는 통화)로서의 지위를 잃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전망까지 나온다. 로이터통신은 “달러화가 금융시장 피난처로서의 지위를 잃고 있다”고 진단했다.

치솟던 달러화, 7월 이후 급락세 #미 재정적자, 중국과 갈등도 한몫 #약세 지속돼 최대 35% 폭락설도 #원·달러 환율 1120원대까지 전망 #‘대체 통화 없어 단기 하락’ 반론도

#영국·일본 등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지수화한 달러인덱스는 코로나19 공포가 극에 달했던 3월 100을 넘어섰다가 8월 말 92로 곤두박질쳤다. 9월에는 금융시장 불안이 커지면서 낙폭을 다소 만회했지만, 8일(이하 현지시간) 현재 93대에 머물고 있다. 최고치였던 3월 19일 103.60에 비하면 10%가량 빠졌고, 2018년 이후 최저 수준이다. 달러화 가치 하락으로 원·달러 환율은 하락(원화 가치 상승)세다. 1달러당 1300원대를 유지하던 원·달러 환율은 단숨에 1152원대로 하락했다. 단기간 원화 가치가 급등하면서 금융시장의 최대 변수가 되고 있다.

그래픽=이정권·전유리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전유리 gaga@joongang.co.kr

급등하던 달러화 가치가 5개월여 만에 급변한 건 코로나19 재확산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돈 풀기’가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코로나19로 세계 경제가 충격에 부딪혔을 때 달러는 안전자산 대접을 받았지만,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달러의 유동성 공급이 확 늘어나면서 ‘공급 과잉’이 된 것이다. 미국 전역에서 코로나19가 재확산 조짐을 보이면서 경기 회복 기대감이 낮아지고 있는 것도 달러화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 경기 침체가 이어지면 이미 역대급으로 늘어난 재정적자는 더욱 증가하고, 연준의 저금리 기조도 이어질 수밖에 없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미국의 주요 언론은 “미국 경제가 코로나 19 쇼크를 벗어나는 속도가 더디고, 미 정부의 대규모 추가 지원 등으로 재정적자가 커지면서 달러화 가치가 하락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유럽·일본 등 전통적 동맹국은 물론 세계 2위 경제대국인 중국과 사사건건 부딪히고 있는 것도 달러화 약세를 부추기고 있다. 미국이 세계 1위 국가로서의 리더십을 사실상 포기한 것으로, 기축통화인 달러화 가치를 훼손하는 요소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시장에선 당분간 달러화 약세 흐름이 이어질 것으로 내다본다. 코로나19의 2차 대유행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데다 연준이 경제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만큼 긴축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작기 때문이다. 실제 미 연준은 6월 공개시장위원회(FOMC)를 통해 물가상승률이 일시적으로 목표치인 2%를 상회하더라도 제로(0) 금리를 유지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김유미 키움증권 연구원은 “단기적으로 달러화 약세 흐름이 주춤하거나 소폭 강세를 보일 수 있겠지만 미국 대선이 마무리되면 달러화 약세가 재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에선 더 극단적인 전망이 나온다. 스티븐 로치 미국 예일대 교수는 “달러화 가치가 주요 통화 대비 35% 하락할 것”이라고 전망을 내놨다. 모건스탠리 아시아지역 회장을 역임한 로치 교수는 CNBC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경제는 매우 낮은 저축율과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라는 상당한 거시 불균형으로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어왔다”며 “달러화 가치는 매우 큰 폭으로 추락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심지어 1919년 1차 세계대전 이후 유지하고 있는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미국의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미국의 대규모 재정지출과 연준의 자산 매입이 통화 가치 하락 공포를 유발하고 있다”며 “국제 외환시장에서 압도적인 지배력을 가진 통화로서 권세가 끝날 수 있다”고 비관했다.

#국내 증권사도 대부분 달러화 약세를 전망하면서 원·달러 환율 전망치를 하향 조정하고 있다. 하나금융투자는 하단을 1140원으로 제시했고 유진투자증권은 1130원, SK증권은 1120원까지 가능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승재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원·달러 환율이 달러화 약세에 대한 뒤늦은 수렴이라면 원·달러는 1130원 내외로 추가 하락이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세계 시장에서 달러화를 대체할 만한 통화가 없는 만큼 달러화 가치 하락이 오래가진 않을 것이라는 반론도 나온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달러는 전 세계 외환보유액의 62%를 차지한다. 1970년대에 기록한 최고치 85%에 비해선 낮지만 여전히 유로화·엔화·위안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버드대 교수이자 전 백악관 경제자문관이었던 하버드대 제프리 프랑켈 교수는 “채권시장에서 미국채 정도의 유동성과 만기를 제공하기 위해서 유럽연합(EU)과 유로화가 갈 길은 아직 멀다”고 주장했다. HSBC은행 도미닉 버닝 외환전략가는 “시장 불안의 근원이 미국이라고 하더라도 달러는 세계가 가장 선호하는 피난처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유럽, 마이너스 금리 만지작…환율전쟁 땐 한국 타격

유럽도 환율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영국(파운드)과 유럽중앙은행(ECB·유로)은 환율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달러화 가치가 내리면서 파운드·유로화 초강세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10일(현지시간)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이날 통화정책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유로화 평가절상에 대해 논의했다”고 밝혔다. ECB가 환율을 들여다 보기 시작한 건 2018년 이후 2년여 만이다. 이에 대해 현대경제연구원은 “ECB가 향후 자산 매입 등 완화적 통화정책 추가 도입 등으로 유로화 약세를 유도할 가능성이 커졌다”며 “환율전쟁으로 확전될 가능성이 대두된다”고 평가했다. 환율전쟁은 수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자국의 통화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노골적이지 않게 자국 통화의 약세를 유도할 수 최선의 방법은 유동성 공급이다. 시장에서는 ECB가 연말께 각종 부양카드를 내놓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실제 라가르드 총재는 “유로존의 부진한 경기 회복을 지원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0% 아래로 더 인하하는 것을 포함해 신규 부양책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앞서 영국 영란은행 총재도 마이너스 금리 도입에 따른 장·단점을 파악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어 유럽이 본격적으로 환율전쟁에 나설 태세다. 환율전쟁은 한국과 신흥국엔 타격이다. 환율 변동성 증가와 자본 유·출입 등 통제하기 힘든 변수이기 때문이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환율전쟁으로 자본 유출입 속도가 빨라지면 외국인 투자자 의존도가 높은 한국 금융시장이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전했다.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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